태백일사
- 일십당 주인 이맥 지어묶음-
삼신오제본기 제일
한국본기 제이
신시본기 제삼
삼한관경본기 제사
소도경전본훈 제오
고구려국본기 제육
대진국본기 제칠
고려국본기 제팔
삼신오제본기 제1
三神五帝本紀 弟一
<<표훈천사>>에서 말한다.
'대시에 위 아래 사방은 일찌 아직 암흑으로 덮여 보이지 않더니 옛것은 가고 지금은 오니 오직 한 빛이 있어 밝더라. 상계로부터 또 삼신이 계셨으니 곧 한 분의 상제시라. 주체는 곧 일신이니 각각 신이 따로 있음이 아니나, 쓰임은 곧 삼신이시라. 삼신은 만물을 끌어내시고 전 세계를 통치하실 가늠할 수 없는 크나큰 지능을 가지셨더라. 그 형체를 나타내지 않으시고 최상의 꼭대기의 하늘에 앉아 계시니 계신 곳은 천만억토요 항상 크게 광명을 발하시고 크게 신묘함을 나타내시며 크게 길한 상서를 내리시더라. 숨을 불어 만물을 만드시고 열을 뿜어 만물의 종자를 키우시며 신묘하게 행하여 세상일을 다스리시니라. 아직 기氣있기 전에 먼저 물을 낳게 하여 태수태수로 하여금 북방에 있으며서 사명으로서 검은 색을 관장케 하시고, 아직 기機있기전에 먼저 불을 낳게 하여 태화로 하여금 남방에 있으면서 사명으로서 붉은 색을 관장케 하시고, 아직 질질도 있기 전에 먼저 나무를 낳으시더니 태목으로 하여금 동방에 있으면서 사명으로서 푸른색을 관장케 하시고, 아직 형이 있기에 앞서 먼저 금을 낳아 태금으로 하여금 서방에 있으면서 흰색을 관장케 하시고, 아직 체도 생기기 전에 먼저 흙을 낳더니 대토로 하여금 중앙에 있으면서 노란색을 관장케 하니라. 이에 하늘 아래 두루 있으면서 오제의 사명을 주관하는 바 이를 천하대장군이라 한다. 지하에 두루 있으면서 오령의 이룸을 주관하는 바 이를 지하여장군이라 한다.
생각컨대 저 삼산을 천일이라 하고 지일이라 하고 태일이라 한다. 천일은 조화를 주관하고 지일은 교화를 주관하며 태일은 치화를 주관하느니라.
생각컨대 5제는 흑제 적제 청제 백제 황제를 말하나니, 흑제는 생명이 다함을 주관하고, 적제는 빛과 열을 주관하고, 청제는 낳아 기름을 주관하고, 백제는 성숙을 주관하며, 황제는 조화를 주관한다.또 생각컨대 5령은 태수 태화 태목 태금 태토라 하나니, 태토는 크게 윤택하게 하며, 태화는 녹이고 익히며, 태목은 지어 이루고, 태금은 재량하여 자르며, 태토는 씨뿌림을 주관한다.
이에 삼신은 곧 5제를 감독하고 명령하사 각각 넓히고 나타내게 하고, 5령으로 하여금 기르고 이루게 하도다. 해가 뜨면 낮이라 하고 달이 뜨면 밤이라 하며, 별의 움직임을 측량하여 춥고 더운 것과 연대를 기록케 하니라.(고기잡이는 배띄워 바다를 지키고, 농사에는 수레를 내어 땅을 지키니라.)코다 삼신일체의 만물의 원리됨이여! 만물원리의 덕이여, 지혜여, 힘이 됨이여! 높고도 넓어서 세상에 가득하며, 깊고 묘하여 불가사의하게 운행함이여!
그런데 사물은 모두 사물의 이치를 가졌으나 이치가 아직 사물에 다하지 못하였고, 사물은 모두 사물의 도리를 가졌으나 도리가 아직 사물에 다하지 못하였고, 사물은 모두 사물의 기능을 가졌으나 기능이 아직 사물에 다하지 못하였고, 사물은 모두 무궁함이 있으나. 무궁함아 아직 사물에 다하지 못 하였나니, 세상에 있으며 산다 하고 하늘로 돌아가면 죽었다 하는데, 죽음은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라.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 있으면 반드시 삶이 있고, 삶이 있으면 반드시 이름이 있고, 이름이 있으면 반드시 말이 있고, 말이 있으면 반드시 행이 있느니라. 이를 산 나무에 비유하면 뿌리가 있으면 반느시 싹이 있고 싹이 있으면 반드시 꽃이 있고, 꽃이 있으며 반드시 열매가 있으며, 열매가 있으면 반드시 쓰임이 있나니라. 이를 또 태양의 움직임에 비유컨대, 어둠이 있으면 반드시 밝음이 있고, 밝음이 있으면 반드시 살핌이 있고, 살핌이 있으면 반드시 행함이 있고, 행함이 있으면 반드시 이룸이 있나니 대저 천하 일체의 물건은 개벽을 좇음으로써 존재하고, 진화를 닮는 일 있음으로써 존재하며, 순환에 닮음 있음으로써 존재하니라.
유원의 기와 지묘의 신은 저절로 하나를 잡아 셋을 포함하여 가득히 빛났으니 있을 곳에 있고 감응하여 대응하니라. 오되 시작된 곳이 없고 가되 끝나는 곳이 없으니 하나에 통하여 만가지를 이루지 못함이 없음이라.
<<대변경>>에서 말한다.
'생각컨대 천일의 신께서는 아득하게 위에 계시나니 곧 삼대와 삼원과 삼일을 가지고 이를 영부하여 크게 내리시사 만만세의 만만백성에게 내리시니 일체는 애오라지 삼신께서 만드신 바니라. 심 기 신(心氣身)은 반드시 필수적으로 서로 의지해야 할 일이로되 아직은 반드시 영원토록 서로 지키지 못하고 영 지 의(靈智意) 삼식(三識)은 곧 영 각 생(靈覺生)의 삼혼(三魂)이 되고, 또 그 소질에 따라 형 년 혼(形年魂)을 넘치게 하느니라. 일찌기 경계에 따라서 느끼고, 숨쉬고, 접촉함이 있으니, 참됨과 망령됨은 서로 삼도(三途)를 끌어들여 갈라지고 말았도다. 때문에 이르기를 참 있음으로써 살고 망 있음으로써 멸하느니라고 했느니라. 이에 사람과 사물의 생겨남은 다같이 그 참된 근원을 <하나>로 하느니라. 성 명 정(性命精)을 삼관(三觀)이라 하나니 관을 수신(修身)의 요회(要會)라 하느니라. 성은 명을 떠나지 않고 명은 성을 떠나지 않나니 정은 그 가운데 있느니라.
심 기 신을 삼방(三房)이라 하고 성화(成化)의 근원(根源)이라 한다. 기는 심을 떠나지 않으며 심은 기를 떠나지 않나니, 신은 그 가운데 있느니라.
감 식 촉을 삼문(三門)이라 한다. 문을 행도(行道)의 상법(常法)이라 한다. 감은 식을 떠나지 않으며, 식은 감을 떠나지 않으며, 촉은 그 가운데 있느니라.
성을 진리의 원관(元觀)이라 하고, 심은 진신(眞身)의 현방(玄房으)로 하고, 감을 진응(眞應)의 묘문(妙門)으로 한다. 이를 탐구하고 성에 의해 진기(眞機)를 크게 발하나니, 신을 분명히 하고 심을 구한다면 진신은 크게 나타나 화응하여 서로 감응하고 진업(眞業)을 크게 이룰 것이니라.
조짐에는 때가 있고 만남에는 장소가 있으나 사람은 빔과 참 사이에 있느니라. 만물은 이에 있는바, 동체인 것은 일기(一氣) 뿐으로, 다만 삼신 뿐이니라. 추궁치 말아야 할 이치가 있고 피하지 말아야 할 도리가 있으며, 거스르지 말아야 할 기능이 있나니, 혹은 선(善) 불선(不善)이 있어 이를 영겁에 보답하고 혹은 선 불선이 있어 이를 자연에 보답하고, 혹은 선 불선이 있어 이를 자손에 보답하느니라.
경에서 말한다.
'사람과 물건은 같은 삼진을 받았으나, 다만 무리는 땅에 혼미하여 삼망이 뿌리를 내리고, 진과 망이 어울려 삼도를 이룬다. 어버이의 도는 하늘을 모범 삼나니 참됨으로써 하나같이 거짓 없고, 스승의 도는 땅을 모범으로 하나니 부지런함으로써 하나같이 게으르지 않으며, 다스림의 도는 사람을 모범으로 삼나니 협력함으로써 하나같이 어김이 없도다.'
<<고려팔관기>>에 삼신설이 있나니, 상계의 주신은 그 호를 천일이라 하나니, 조화를 주관하시며 절대지고의 권능을 갖고 계신다. 무형으로써 형을 삼으며, 만물로 하여금 각각 그 성을 통하게 하시느니라. 이를 청진대의 체라 한다. 하계의 주신은 그 호를 지일이라 한다. 교화를 주관하며 지선유일의 법력이 있어 하는 바 없이 만들고 만물로 하여금 각각 그 명을 알게 하니, 이를 선성대의 체라 하느니라. 중계의 주신은 그 호를 태일이라 한다.치화를 주장하며 최고무상의 덕량을 가지고 말 없으면서 교화하고 만물로 하여금 각각 그 정을 보정하게 하니, 이를 미능대의 체라 하느니라. 한인씨는 한번 변화하여 칠이 되며, 두번 변하여 육이 되는 운을 받아 애오라지 어버이의 도를 사용하여 천하에 쏟으매,천하가 이에 교화된다. 신시씨는 천일의 생수와 지이의 생화의 자리를 계승하여 애오라지 스승의 도를 사용하여 천하를 인솔하매, 천하가 이에서 배운다. 왕검씨는 지름이 둘레를 한바퀴 도는 길이인 3,14의 기를 받아 애오라지 왕의 도를 써서 천하를 다스리니, 천하가 이에 따른다고 한다.
<<오제설>>에서 말한다.
'북방의 사명을 태수라 한다. 그의 다스림은 흑이니 그 호를 현묘진원이라 한다. 그를 보좌함을 한인이라 하고 소류의 하늘에 계시며, 이를 대실상이라 한다. 동방의 사명을 태목이라 한다. 그의 다스림은 청이니 그 호를 동인호생이라 한다. 그를 보좌함을 대웅이라 하며 태평의 하늘에 있으니 이를 대광명이라 한다. 남방의 사명을 태화라 한다. 그의 다스림은 적이니 그의 호를 성광보명이라 한다. 그를 보좌함을 포희라 하고 원정의 하늘에 있으며 이를 대안정이라 한다. 서방의 사명을 태금이라 한다. 그의 다스림은 백이니 그의 호를 청정견허라 한다. 그를 보좌함은 치우라 하고 구화의 하늘에 있으며 이를 대희리라 한다. 중방의 사명은 태토라 한다. 그의 다스림은 황이니 그의 호를 중상유구라 한다. 그를 보좌함은 왕검이라 하며 안덕의 하늘에 있으니, 이를 대예락이라 하느니라.'
<<오제설>>의 주에 말한다.
'오방에 각기 사명이 있으니 하늘에서는 제라하고 땅에서는 대장군이라 한다. 오방을 감독하고 살피는 자를 헌하대장군이라 하고 지하를 감독하고 살피는 자를 지하여장군이라 한다. 용왕현구는 선악을 주관하며, 주작적표는 목숨을 주관하며, 청룡령산은 곡식을 주관하며, 백호병신은 형벌을 주관하며, 황웅여신은 병을 주관한다.'
삼신산을 천하의 뿌리산이라 한다. 삼신으로 이름 삼음은 대저 상세이래로 삼신이 이곳에 내려와 노닐으시고 삼계를 널리 감화하심을 믿기 때문이라.360만의 큰 둘레의 하늘은 크체가 불생불멸이시며 그 용이 무궁무근이나, 그의 법식과 이치는 때가 있으며 장소가 있으니 신의 지극히 자상하고 지극히 현명하여 여의자재하심은 끝내 이를 알 수가 없다. 그를 맞이함에는 흡사 눈에 보이는 듯이 하고, 그 바치는 일은 문득 들리는 바 있는 것 같이 하고, 그 한탄함에는 기꺼이 하사받음이 있는 듯이 하고, 그 서약함에는 숙연하여 얻는 것이 있는 듯이 하며, 물건을 바칠 때에도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바침이니, 이렇게 만세 인민이 인식추앙하여 모두가 다 기쁘게 믿는 것이다.
삼신산에 어떤 설에서 '삼은 신이 되고 신은 또 백으로 되며, 신은 또 백으로 되며 신은 고가 되는 고로 고는 바로 두가 된다. 때문에 또 백두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하고, 또 말하기를 '개마는 해마리의 전음이다.'라고했다. 고어에는 힌것을 해라하고 두를 마리라고 하니 백두산의 이름도 역시 이예서 생긴 것이다.
인류의 조상을 나반이라 한다. 처음 아만과 서로 만난 곳을 아이시다라 한다. 또 사타려아라고도 한다. 어느날 꿈에 신의 계시를 받아 스스로 혼례를 이루었으니, 정안수를 떠 놓고 하늘에 알린후 돌아가며 술을 마셨는데, 산남의 주작이 날아와서 즐기고, 수북의 신구가 상서를 나타내고, 곡서엔 백호가 산모퉁이를 지키고, 계동엔 창룡이 하늘로 승천하고, 가운데 황웅이 있었다. 천해 금악 삼위 태백은 본디 구한에 속한 것이며 9황의 64민은 모두 그의 후예이다. 그러나 1산1수가 각각 한나라가 되매, 사람들도 역시 서로 따라가 경계를 나누니 경계에 따라 나라를 달리하게 되었다. 나라를 달리 한지 오래되니 창세의 조서의 뒤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장구한 세월 뒤에 한인이란 분이 나타나셔서 여러사람들의 사랑으로 추대되어 안파견이라고도 하고 거발한이라고도 하였다. 대저 안파견이라 함은 하늘을 계승하여 아버지가 되었다는 거발한이라 함은 천 지 인을 하나로 정한다는 뜻의 이름이니라. 이로부터 한인의 형제 아홉 사람은 나라를 나누어 다스렸으니,이를 9황 64민이라 한다.
그윽히 생각해 보건대 삼신은 하늘에 태어나시사 물건을 만드시고, 한인은 사람을 가르치어 의를 세우시니 이로부터 자손은 게속해서 이어졌고, 현묘한 가운데 도를 얻으시고 광명한 가운데 세상을 다스리시니라. 이미 천지인 삼극은 있었고, 대원일은 이것이 만물의 원리가 되었으니 곧 천하 구한의 예악이 어찌 삼신고제의 풍속에 없었을 손가? 전에서 말한다.
'삼신의 후를 일러 한국이라 하니 한국은 천제께서 계시는 곳의 나라니라.'
또 가로대
'삼신은 한국의 선대에 있었고 나반이 죽어 삼신이 되셨으니 그 삼신이라 함은 영구생명의 근본이라.'
고 하였은, 그래서 또 말한다.
'사람과 물건이 함께 삼신에게서 나왔으니, 삼신으로써 한근원의 조상으로 삼느니라.'
한인도 역시 삼신을 대신하사 한국의 천제가 되었다. 뒤에 나반을 대선의 천이라 하고, 한인을 대중의 천이라 하고 한인 한웅 치우를 삼황이라 하며, 한웅을 대웅의 천이라 하고 치우를 지위의 천이라 한다. 곧 <<황제중경>>에서 비롯된 유래이다.
삼광오기가 모두 시청감각에 달려 있었지만 세월이 흘러 불을 피우고 말을 하게 되고 글자를 만들었으니, 뛰어나고 열등하여 이기고 지는 다툼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웅족 가운데 단국이 있어 가장 강성했다. 왕검 역시 하늘에서 내려와서 불함산에 사시니,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받들어, 단군으로 모시어 이를 단군왕검이라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극히 신묘하고 성스러워 구한의 삼한관경을 모두 통합하였다. 신시의 옛규칙을 회복하니 천하는 크게 다스려져서 온세상이 그를 천신과 같다고 보았다. 이때부터 숭보의 예는 영세토록 바뀌지 않았다.
대저 구한의 족속은 나뉘어 5종이 되고 피부의 색갈과 모양을 가지고 구별을 짓게 되었다. 그 풍속은 모두다 실제에 임하여 이치를 찾고 일을 계획하여 그것이 옳음을 구함이 같았다. 부여는 풍속에 가뭄과 병란 및 질병은 국왕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고 충성됨과 사악함과 살고 죽음은 필부에게도 같이 돌아오는 법이라 하니, 이것이야말로 한 증거가 된다.
색족은 어떤 것일까? 황족은 피부가 좀 누렇고 코는 튀어나오지 않았으며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머리털이 검고 눈은 펑퍼짐하며 청흑색이요, 백부인은 피부는 밝고 뺨은 높고 코도 크며 머리털은 회색이며, 적부인은 피부가 녹슨 구리색이요, 코는 낮아 뭉툭하며 이마는 넓고 뒤로 기울고 머리털은 곱슬머리로 황부인과 비슷하며, 남부인은 풍족이라고도 하며 또 야자나무 색갈의 인종이라고 한다. 그 피부는 암갈색으로 모양은 오히려 황부인과 같다.삼한에 옛 풍속이 있는바 모두 10월 상순에 국중대회를 열어 둥근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지낸다. 땅에 제사지냄을 방구라 하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제사지냄은 각목이라 하나니, 산에 웅상의 상을 만듬은 모두 그 유법이다. 하늘에 제사지냄에 있어서 반드시 한(임금)이 몸소 제지내니 그 에법이 매우 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날 멀리 가까이의 모든 사람들이 그 생산한 것을 바치고는 북치고 나팔 불며 온갖 놀이를 벌이고, 여러 작은 나라들이 찾아와 특산물을 바치니 진기한 것들이 언덕과 산처럼 둥그렇게 쌓인다. 대저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으니 곧 관경을 번식케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소도의 제천은 구려를 교화하는 근원이 되었다. 이로부터 화를 당하여 함께 함쓰고 이웃을 위하며, 있는자와 없는 자가 서로 도우니, 문명은 나라를 이루고 개화 평등하여 온 세상에 제사의 예를 숭상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아기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여 삼신이라 하고 벼가 익은 것을 축하하여 업이라 하였다. 산을 군생통력의 장소라하고 업을 생산작업의 신이라 한다. 때문에 또한 업주가리라고도 한다. 집터에 발워하면 토주대감이라 하고 접예 발워하면 성조대군이라 하니 또한 해마다 좋은 복을 이루는 신이다. 묘자리를 쓸 때, 고기잡이 나갈 때, 진을 칠때, 길을 떠날 때, 모두 각각 제가 있으니 제는 반드시 날짜를 골라 재를 올려야 복을 이루는 것이라.
소도가 서면 언제나 게가 있나니 바로 충효신용인의 오상의 길이니라. 소도의 곁에 반드시 경당을 세우고 결혼하지 않은 사내들로 하여금 여러가지 사물을 익히고 연마하게 하였다. 대체로 글을 읽고, 활을 쏘며, 말을 타고 예절을 익고, 노래를 배우며 격투기, 검술 등의 여섯가지 기예를 말한다.
모든 부락에서는 스스로 삼로를 모셨으니, 삼로는 또 삼사라고도 한다. 어진덕을 갖춘자가 있고 재물을 베푸는자, 지를 갖춘자가 있으니, 누구나 그들에게 사사함이 이와 같다. 또 육정이 있는바 곧 현좌 충신 양장 용졸 명사 덕우가 그들이니라. 또 살생에 법이 있으니, 우론 국왕으로부터 밑으론 서민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스스로 때와 물건을 가려서 했다. 그래서 살생함에 있어 첫째로 함부로 죽여서는 안되나니, 옛부터 부여에 말이 있어도 타지 않고 죽이는 것을 금하고 방생한다 함은 역시 이런 뜻이다. 그러므로 깃든 짐승은 죽이지 않으며 알을 품은 짐승을 죽이지 않는다 함은 그 번식할 때를 가려서 죽이지 않기 때문이라. 어린 것을 죽이지 않고, 이로운 짐승을 죽이지 않고 살림은 그 짐승의 종류를 가림이라. 물건을 중하게 여김이 이처럼 지극했다 할 것이니라.
원화는 여랑을 말하고 남자를 화랑이라 하며 또 천와랑이라고도 하니,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까마귀 깃털이 달린 모자를 하사 받는다.모자를 쓰는데에도 의식이 있다. 주해에 이르기를 '때에 큰나무를 모시어 한웅의 신상이라 하고 이예 경배한다. 신령스런 나무는 이를 웅상이라 한다'고 하였으니, 상은 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니라.
하백은 천하의 사람으로 나반의 후손이다. 7월 7일은 나반이 하늘을 건너는 날이다. 이날 용왕에게 명하여 하백을 부르나니, 용궁에 들어가 이로 하여금 사해의 뭇신을 주관케 하느니라. 천하는 다른 이름으로 천해라고도 한다. 지금의 북해가 바로 그것이다.
천하의 주에 가로대 '천도는 북극에서 일어난다. 이를 북수라 한다.' 라고 했다. 대저 북극은 수정자가 기거하는 곳이다.
한국본기 제2
桓國本紀 弟二
<<조대기>>에서 말한다.
'옛적에 한안이 계셨나니 하늘에서 내려오시사 천산에 사시면서 천신에 제사지내고, 백성에겐 목숨을 정하시고, 모든 일을 두루 다스리시니 들에 사시매 곤충과 짐승의 해독이 없어지고, 무리와 함께 행하시니 원한을 품거나 반역하는 일 또한 없어졌느니라.
친하고 멀다 하여 차별을 두지 않았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라고 하여 차별을 두지 않았으며, 남자와 여자의 권리를 따로하지 않았고, 늙은이와 젊은이의 일을 구별했으니, 이세상에 법규가 없었다 하지만 계통은 저절로 성립되고 순리대로 잘 조화 되었도다. 질병을 없게 하고 원한을 풀며 어려운자를 도와 일으키며 약자를 구제하니, 원망하고 일부러 어긋나는 자 하나도 없었다.
당시 사람들은 스스로 호를 한(桓)이라 하고 감군을 인(仁)이라 불렀다. 인이란 임(任)이란 말이니 널리 사람을 구제하고 셰상을 이치대로 밝히는 것은 이를 반드시 어질게 되도록 하기 위함이라. 때문에 오가의 무리가 서로 바꿔가면서 대중에게서 뽑힘은 반드시 업을 구하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구별이 있음은 각각 마음 먹는 바에 따르는 법이니, 그 마음을 잘 판단하여 스스로 구하는 바 정곡을 선택하기 때문이라. 생각컨대 구한에 사는 자들이 서로를 위하여 모두 함께 하나오 몽쳤던 것도 역시 마땅히 스스로 득실을 선택하매 한 사람도 딴 의견이 없었던 것이니, 그런 후라야 이에 따르게 됨이라. 여러 대중도 역시 감히 갑자기 한쪽으로 편향치 않으며 오직 꾀로써 이에 대처하느니라. 대저 무리에 대처하는 법은 무비면 유환이며 유비면 무환이니라. 반드시 예비하고 자급할 지니라. 선군은 만리를 능히 다스려 한소리에 말없이 행동으로 옮겨지니, 즉 여기에 이르러 만방의 백성들이 기약하지 않고서도 와서 모이는 자 수만이더라. 무리는 저절로 환무하며 저절로 환인을 추대하여 환화가 피어난 돌무지위에 안즈시게 하더니, 그에게 줄지어 경배하고 환홋니 넘쳐 흐르니 이를 인간 최초의 우두머리라고 한다.'
<<삼성밀기>>에서 말한다. '파나류산 밑에 한인씨의 나라가 있나니 천해 동쪽의 땅을 역시 파나류국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이니라. 통틀어 말하면 한국이요, 갈라서 말하면 곧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 일군국, 우루국(또는 필나국),객현한국,구모액국,매구여국(또는 직구다국),사납아국,선비이국(또는 시위국,통고사국이라 함.),수밀국이니 합쳐서 12국이라. 천해는 지금의 북해라 한다.'
<<밀기>>의 주에서 말한다.
'개마국은 일명 웅심국이라 하니 북개마대령의 북쪽에 있으며 구다국으로부터 거리가 200리이다. 구다국은 옛날에는 독로국이라 칭했고 북개마대령의 서쪽에 있는 나라니라. 월지국은 그 북쪽 500리에 있고, 직구다국 혹은 매구여국은 옛 오난하에 있었으며, 뒤에 독로국에 패하여 마침내 금산으로 옮겨 그곳에서 살았다. 구다국은 본래 쑥과 마늘을 산출하던 곳이었다. 쑥은 다려서 복용함으로써 냉을 치료하고 마늘은 불에 구워 먹음으로써 재앙을 다스린다.'
<<조대기>>에서 말한다.
'옛날에 한국이 있었는데 무리는 풍족하고 풍부하였다. 처음 한인께서 천산에 사시면서 도를 얻으시사 몸을 다스려 병도 없고 하늘에 대신하여 교화를 일으켜 사람으로 하여금 전쟁도 없게 하시고, 사라마다 모두 힘써 일함으로써 근면하여 스스로 굶주림도 추위도 없게 하였다. 혁서한인, 고시리한인,주우양한인,석제임한인, 구을리 한인에 전하여 지위리한인에 이르니 혹은 단안이라 한다. 7세를 전하여 3301년에 이르고 혹은 6만3천1백82년이라고도 한다.
'한국에 5훈이 있으며 신시엔 5사가 있나니 이른바 5훈이란 이른바 첫째 성실하고 믿음으로써 거짓이 없을것, 둘째 공경근면함으로써 게으르지 않고,셋째 효도 순종하여 어김이 없고, 넷째 염치와 의리 있어 음란치 않으며, 다섯째 겸손화목하여 다툼이 없는 것 등이다. 이른바 5사란 우가는 농사를 주관하고, 마가는 목숨을 주관하고, 구가는 형벌을 주관하며,저가는 병을 주관하며, 양가(혹은 계가라 함)는 선악을 관장함을 말하는 것이라.'
한국의 주에서 말한다.
'한(桓)은 전일의 광명이라. 천일을 삼신의 지혜와 능력이라 하고, 광명을 삼신의 참된 덕이라 하니, 온 우주만물에 앞섬을 말함이다.'
<<조대기>>에서 말한다.
'옛 풍속은 광명을 숭상하였으니 해로써 신을 삼고 하늘로써 조상을 삼았나니, 만방의 백성은 이를 믿고 서로 의심치 않으며 아침 저녁에 경배하며 이를 가지고 일과로 삼았다.'
태양은 광명이 만나는 곳으로서 옛날부터 삼신이 계시는 곳이라. 사람은 빛을 얻음으로써 농사짓고, 하는 바 없는 듯하면서도 스스로 교화되나니, 아침엔 함께 동쪽산에 올라가 해가 처음 뜨는 것을 경배하고 저셕엔 곧 함께 서쪽 강가로 나아가서 달이 처음 뜨는 것에 경배한다. 이에 앞서 한인꼐서 때어나시사, 절로 다섯가지 사물을 만들고 기름을 아시고 다섯가지 가르침을 가르치시고 다섯가지 일들을 다스리시었다. 오가의 무리는 모두 어려움을 참고 부지런하여 잘배워 지닌 끝에 마음의 빛을 얻어 상서로운 일을 만들고 세상의 즐거움을 얻었더라. 한인께선 높고 높은 하늘에 오르사 홀로 생각하시며 차분히 온갖 일을 다스리시니 감히 따르지 않는자 없어 구한의 백성이 모두 하나로 돌아오게 되었다,
신시본기 제3
神市本紀 弟三
<<진역유기>>의 신시기에서 말한다.
'한웅천왕께서 사람의 거처가 이미 완성되고 만물이 각각 그자리를 가짐을 보시더니 곧 고시례로 하여금 먹여 살리는 임무를 담당하도록 하시고 이를 주곡이라 하셨다. 그런데 이 때는 아직 농사의 방법도 잘 갖춰지지 않았고 불씨도 없음이 걱정이었는데 어느날 우연히 산에 들어가니, 다만 교목들만 거칠게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앙상하게 말라버린 나뭇가지들이 제멋대로 흩어져 어지러이 교차하고 있는 것을 오래도록 침묵하며 말없이 보고 서 있는데 홀연히 큰바람이 숲에 불어 닥치자 오래된 나뭇가지에서 여러가지 소리가 일어나면서 서로 부딪쳐 비벼대며 불꽃을 일으키는데 번쩍번쩍 하고 불길이 잠깐 동안 일어나더니 곧 꺼졌다.
이에 홀연히 깨달은 바가 있었으니,(이것이로다, 이것이로다. 이것이 곧 불을 얻는 법이로다)라고 말하며 오래된 홰나무가지를 모아다가 서로 비벼 불을 만들었으나, 다만 완전한 것이 못되었다. 다음날 다시 교목들의 숲에 가서 이리왔다. 저리갔다 하며 깊이 생각에 잠겼는데, 갑자기 한 마리의 줄무늬 호랑이가 크게 울부짖으며 달려드는지라 고시씨는 크게 한마디 외치면서 돌을 집어 던져서 이를 맹타했다. 그러나 겨냥이 틀려서 바위의 한쪽에 돌이 맞아 번쩍하고 불을 냈다. 마침내 크게 기뻐하며 돌아와 다시 돌을 쳐 불씨를 만들었다. 이로부터 백성들은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쇠를 녹이는 기술도 일어나더니 그 기술도 점차로 진보하게 되었다.
한웅천왕은 또다시 신지 혁덕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게 하셨다. 대저 신지씨는 세세토록 명령을 전하는 직책을 맡고 출납헌체의 임무를 전담하고 있었는데, 다만 목소리에 의존했을 뿐 일찌기 문자로 기록하여 남기는 방법은 없었다. 어느날 무리와 더불어 사냥을 나갔는뎨 갑자기 튀는 한마리의 암사슴을 보고 활을 당겨 쏘려고 했으나 둘러보는 사이에 암사슴의 종적을 놓지고 말았다. 이에 사방을 수색하면서 산과 들을 지나 평평한 모래땅에 이르러 비로소 발자국을 발견했는데, 어지러이 흩으러져 연결 되었으나 향한 곳은 절로 확실하였다. 마침내 머리를 떨구고 침묵 끝에 다시 크게 깨닫고 말하기를 (기록으로써 남기는 일은 다만 이것 뿐이리라, 기록해 남기는 방법은 다만 이것뿐이리라)라고 하며 그날 사냥을 끝내고 돌아와 되풀이 하여 다시깊이 생각하고 널리 만물의 모양을 관찰하여, 오래지 않아서 처음으로 문자를 만드는 법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 태고문자의 시작이라 한다. 그런데 후세에는 연대가 까마득히 흘러서 태고문자는 다 사라져서 존재치 않는다. 아마도 역시 그 만들어 놓은 것이 아직 편리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일찌기 듣기로 <남해도의 낭하리 계곡및 경박호의 선춘령과 저 오소리 사이의 바깥쪽 암벽 사이에서 언젠가 조각이 있음을 발견하였는데 범자도 아니고 전자도 아니며 사람들이 알 수가 없는것>이라 했으니, 이게 신지씨가 만든 옛 문자가 아닌지 모르겠다. 여기에서 우리나라가 아직 떨치지 못하고 우리 민족이 강하지 못함을 새삼 한탄한다.
한웅천왕께서 풍백 석제라를 시켜 짐승과 벌례와 물고기의 해를 제거하도록 하였지만 백성들은 아직 동굴이나 흙구덩이 속에 살았기 때문에 밑에선 습기가 스며 올라오고 밖에서는 바람이 불어와서 사람들에게는 질병을 일으켰다. 또 새 짐승 물고기 등을 급하게 쫓아버려 점차로 도망가서 숨어 버리니 잡아서 먹는데도 불편하였다.
이예 우사 왕금영으로 하여금 사람의 살곳을 만들게 하고 소 말 개 독수리 돼지 호랑이 등의 짐승을 모아 목축 이용을 관장케 하고, 운사 육약비로 하여금 남녀의 혼례의 법을 정하게 하고 치우는 곧 세세토록 병마도적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이 때부터 치우 고시 신지의 후손들은 지극히 왕성하게 번영하였다. 씨우천왕의 등극에 이르러 구야를 만들어 동과 철을 채취하고 철을 단련함으로써 도극 대궁을 만들고 사냥과 정벌,전쟁의 무기로 삼았다. 생각컨대 신으로부터 멀리 있는 바깥에 있는 여러 족속들은 대궁에 대한 두려움이 아주 컸던 듯 소문만 듣고도 간담이 서늘한 지 오래 되었다. 때문에 저들은 우리 종족을 가리켜 <이>라고 했다. <<설문>>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이>는 큰 것으로부터, 활로부터 나온 글자로 동쪽에 사는 사람>이라 함이 이것이다. 공자의 춘추에 이르러 이의 이름을 마침내 융적과 나란히 오랑캐의 호칭이라 했는데 애석한 일이다.'
<<삼성밀기>>에서 말한다.
'한국의 말기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족이 있어 이를 우환으로 여겼다.한웅께서는 나라를 위해 삼신으로써 가르침을 삼아 무리를 모아 서약을 만드셔서 은말하게 전제의 뜻을 가졌다. 그때는 종족의 이름이 서로 달랐으니, 풍속도 차츻 달라져서 원래 살던 백성을 호랑이라 하고 새로 살기 시작한 백성을 곰이라 했다. 그런데 호랑이는 성질이 탐욕스럽고 잔안하여 애오라지 약탕만을 일삼았고 곰은 어리석어 사람을 따르지 않고 자부하는 마음이 세어 조화되기를 구부하였으니, 같은 굴에 살았지만 점점 멀어지고 지금까지 한번도 서로 돕지도 않고 혼사도 트지 않을 뿐 아니라 일마다 서로 따르지도 않고 아직 한번도 뜻을 함께 한적이 없었다. 이에 이르러 웅녀의 군은 한웅에게 신덕이 있다함을 듣고 곧 무리를 이끌고 가서 뵈옵고 말하기를 <바라옵건대 하나의 굴을 내리시어 하나같이 신계의 백성이 되게 하시기를 비옵니다.>라고 하니, 한웅께선 마침내 이를 허락하사 이를 맞아 들이시고 아들을 낳게 하였다. 호랑이는 종내 깨우칠 수 없는지라 이들을 사해로 쫓아 버렸다. 한족은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 되었다.'
조대기에서 말한다.
'때에 사람은 많고 산업은 궁핍하여 그 살아갈 방법이 없어 걱정이었다. 서자부에 한웅이라는 대인이 있었는데 여러가지 사정을 살피더니 하늘에서 내려가 땅위에 하나의 광명세계를 열려고 생각하였다. 때에 안파견이 두루 금악 삼위 태백을 살피더니 태백은 이로써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만한지라 한웅에게 명하여 가로대 <이제 사람과 물건의 업은 이루어진 듯 하다. 그대 수고를 아끼는 일 없을지니라. 무리를 이끌고 하늘에서 내려가 하계에 가서 하늘의 뜻을 펴 가르침을 베풀고 천신에 제사지내는 것을 주관하라. 어버이의 권위를 세워서 늙은이와 어린이를 보살펴서 모두 다 평화롭게 하라.가르침의 도를 세워서 재세이화하여 사손 만대의 큰 귀감이 되도록 말지어다>하시며 마침내 천부인 세개를 주시고 그를 보내어 이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한웅이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은 신단의 나무아래 내려오시니 이를 신시라 한다. 풍백 우사 운사를 데리고 농사를 주관하고, 삶을 주관하며, 형벌을 주관하고, 병을 주관하시고 선악을 주관하면서 무릇 인간의 360여사를 두루 주관하시사, 세상에 계시며 이치대로 교화하여 인간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셨다. 이를 한웅천왕이라 한다.
때에 한 곰과 호랑이가 있었는뎨 이웃하여 같이 살았다. 항상 신단수에 기도하며 또 한웅천왕에게 청하기를 <원컨대 변화하여 천계의 백성이 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한웅은 이에 신비한 주문을 외워 환골이신 하도록 하면서 신이 내리신 물건으로써 신령스러운 삶을 얻게 하였으니, 바로 쑥 한다발과 마늘 20개라. 이에 경계할 바를 말하니,
<너희들 이를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저절로 참된 평등을 이루어 만물을 구제하고 쉽사리 사람까지 교화하는 도리를 아는 대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시다. 곰과 호랑이 양가는 모두 이를 얻어 이를 먹고 조심하기 3ㅋ7일에 스스로 수련에 힘쓰니 곰은 굶주림과 추위 아픔 고통에 견디어 경계함에 순종하고 한웅의 약속을 지켜 건강한 모습의 여자로 되었지만 호랑이는 태만하고 조심하여 경계를 지키지 못하였으니, 끝내 천업에 함께 할 수 없었다. 이것이 둘의 성질이 서로 닮지 않은 모양이다. 웅씨의 여러 여인들은 고집세고 어리석고 강정하여 저들과 더불어 혼인하는 자가 없었고, 항상 신단수 밑에 여럿이 모여 아기를 가져 낳을 수 있게 되기를 빌었다. 이에 한웅은 임시로 화하여 한이되어 장소를 구하여 그와 혼인하여 자식을 잉태케 하였다. 이로부터 여러 여자와 남자들은 차츰 윤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 뒤 호를 단군왕검이라 하는 분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시니 지금의 송화강이라. 처음으로 나라를 칭하사 조선삼한이라 하니 고리 시라 고례 남북의 옥저 동북의 부여, 예와 맥은 그의 관경이었다.'
신시에 칠회제신의 책력이 있었다. 첫회의 날엔 천신에 제사 지내고, 2회의 날엔 월신에 제사지내고, 3회날에는 수신에 제하고,4회날에는 화신에 제지내고, 5회날에는 목신에 제하고, 6회날에는 금신에 제지내고, 7회날에는 토신에 제지내었다. 대저 책력을 만듬은 례서 비롯됨이라. 그렇지만 옛날엔 계해를 썼나니 단군구을이 처음으로 갑자를 써서 10월읠 상달이라 하고 이를 한해의 시작이라 했다. 육계는 신시씨에 의하여 신지에 명하여 제정된 것으로 계를 처음으로 시작한다.계는 啓요 해는 핵이니,일출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계를 蘇羅라하고, 갑을 청차이라 하고, 을을 적강이라 하고 ,병을 중림이라 하고 정을 해익이라 하고, 무를 중황이라 하고, 기를 열호수라 하고, 경을 임수라 하고, 신을 강진이라 하고, 임을 유부지라 했다.해를 지우리, 자를 효양,축을 가다,인을 만량,묘를 신특백,진을 밀다,사를 비돈,오를 융비,미를 순방,신을 명조, 유를 운두,술을 개복이라 한다.
신시가 처음 시작 되었을 때에 산에는 길도 없고 못에는 배도 다리도 없고 짐승들은 무리를 이루었으니 나무들과 풀들이 자란 곳에는 짐승들의 무리가 있었다. 그리하여 만물과 짐승의 무리들은 서로 어울렸고 새의 둥지에서까지 놀면서 서로 의지했다.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셨으니 그 피와 고기를 항상 쓸수 있었다. 옷감을 짜고 먹을 것을 경작함에 편리한 대로 다 되었으니, 이를 지극한 덕의 세상이라고 말한다.백성은 살아도 일같은 것을 모르고 걸어다닌다 해도 톡별한 목적지도 필요 없었으니, 길을 가되 한없이 편안했고 사물을 보되 한없이 편안했고 사물을 보되 담담하였다. 먹을 것을 모아 놓고 기꺼워하며 배를 두드리며 놀고,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지면 쉰다. 대저 하늘의 혜택을 널리 입어 궁핍을 알지 못함이라. 뒤이어 후세에 이르러 백성들과 사물들은 날로 번성하더니 소박한 것은 멀리 하게 되고, 절름발이도 있게 되고, 몹시도 마음 쓰일 일이 생기고, 기운 없고 피로하여 허덕일 일 생기고, 빈둥빈둥하는 이도 있게 되어 처음으로 생계를 염려하게 된다. 여기에서 밭 가는 자는 이앙을 다투게 되고 물고기 잡는 자는 바다의 구역을 가지고 다툰다. 다투지 않고 이를 얻게 되면 장래에 궁핍을 면키 어렵게 된다. 이렇게 된 이후, 활이 만들어지니 새와 짐승들은 도망치고 그물을 치니 물고기 새우가 숨게 되었고 칼과 창과 병사들도 생기게 되었다. 너와 내가 서로 공격하고, 이를 갈며 피를 흘리고, 간과 뇌를 땅바닥에 뿌리게 된다. 이것 역시 하늘의 뜻이 참으로 이러했던가? 아아, 전쟁을 면할 수 없음을 알겠다. 이제 저들의 그 근원을 탐구해 보면 아마도 한 뿌리에서 비롯한 조상일 것인데, 땅은 이미 동서로 갈리어 각각 한 구석씩을 차지하였으니, 땅은 멀리 떨어져 사람들의 인연은 통하지 않고, 백성은 나 있음을 알면서 남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냥하고 나무를 베는 일 외엔 이찌기 험상궂게 일그러질 없더니 천년의 세월을 셀수 있게 되자 시국은 이미 변하여 중국은 서양인들이 노리는 보물창고가 되어 천리 기름진 평야에 바람만 널리 마구 분다. 우리 한족 가운데 그 지역에 나뉘어 옮겨간 족속들은 침을 흘리며 이리저리 굴러 전전하고 토착의 백성들도 역시 마구 휩쓸려 모여들었다. 여기에서 어찌 같은 집안 식구들끼리 원수를 달리하고 창칼의 움직임을 노릴손가 이야말로 실로 만고의 전쟁의 시초더라.
한웅천왕으로부터 다섯번 전하여 태우의 한웅이 계셨으니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를 반드시 묵념하여 마음을 맑게하고 조식보정케 하시니 이것이야말로 장생구시의 술이다.아들 열둘을 두었으니 맏이를 다의발한웅이라 하고 막내를 태호라 하니 또는 복희씨라고 한다. 어느 날 삼신이 몸에 내리는 꿈을 꾸어 만가지 이치를 통철하고 곧 삼신산으로 가서 제천하고 괘도를 천하에서얻으시니, 그 휙은 세번 끊기고 세번 이어져 자리를 바꾸면 이치를 나타내는 묘가 있고 삼극을 포함하여 변화무궁하였다.
<<밀기>>에서 말한다.
'복희는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의 자리를 세습하고 뒤에 청구와 낙랑을 거처 마침내 진에 옮겨 수인,유소와 나란히 그 이름을 서방에 빛내었다. 후예는 갈리어 풍산에 살았으니 역시 풍을 성씨로 가졌다. 뒤엔 마침내 갈라져 패관임기포이사팽의 여덟가지 성이 되었다. 지금 산서성의 계수에 희족의 옛 거처가 있다. 임 숙 수 구 수유의 여러나라는 모두 여기에 모여 있다.'
<<대변경>>에서 말한다.
'복희는 신시로부터 나와 우사가 되었다. 신용의 변화를 보고 괘도를 그리고 신시의 계해을 바꾸어 갑자를 처음으로 하였다. 여와는 복희의 제도를 이어 받다. 주양은 옛 문자에 의하여 처음으로 육서를 전했다.복희의 능은 지금 산동성 어대현 부산의 남쪽에 있다. 신농은 열산에서 일어났는데 열산은 열수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신농은 소전의 아들이다. 소전은 소호와 함께 모두 고시씨의 방계이다. 대저 당시의 백성들은 정착해서 생업을 이어갔으며, 차츰 크게 되자 곡마약석의 기술도 또한 점점 갖춰져서 낮에는 저자를 이루어 교역하고 되돌아갔다. 유망이 정치를 하면서 급하게 모든 읍의 백성들이 제휴하도록 했으나 떠나는 배성들이 많아져서 세상의 도가 매우 어지러워졌다.'
우리 치우천왕께서는 신시의 옛 힘을 받으시사 백성과 더불어 제도를 새롭게 하시니, 능히 하늘에 제사지내 삶을 아시고, 땅을 여시사 삶을 도모하시고, 사람을 발탁하여 삶을 숭상할 수 있으셨다. 온갖 사물의 원리는 빠짐없이 몸소 살펴보니, 그 덕이 미치지 않는 곳 없었고, 지혜는 뛰어나지 않음이 없었으며,힘 또한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셨다. 이에 백성과 더불어 범무리들을 따로 떼어서 하삭에 살도록 하고는 안으로는 용감한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관찰하셨다. 유망의 정권이 쇠약하여지니 군대를 보내어 정벌하였다. 집안과 가문에서 장수 될만한 인재 81명을 골라 여러 부대의 대장이 되게 하고 갈로산은 쇠를 캐내어 도개 모극 대궁 호시를 만들어 한결같이 잘 다듬더니 탁록을 공격하여 함락시켜서 구혼에 올랐다. 연전연승하는 그 위세는 질풍과 같아서 만군을 겁에 질려 굴복케하고 위세는 천하에 떨치더라. 한해 동안에 아홉개의 제후의 땅을 정복하고 다시 옹호산에 웅거하여 구야로써 수금과 석금을 개발하여 예과와 옹호의 창을 만들어내고, 다시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들을 이끌고 양수를 건너 출진하더니 재빨리 공상에 이르렀다. 공상은 지금의 진류이며 유망이 도읍했던 곳이다.이해에 12제후의 나라를 점령하고 죽이니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그득 메우게 되었다. 이에 서토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 도망치지 않는자가 없었다.때에 유망은 소호로 하여금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대왕은 예과와 옹호극을 휘두르며 소호와 크게 싸우고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적의 장병으로 하여금 혼미케하여 스스로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소호는 대패하여 변방으로 도망치더니 유망과 함꼐 도망쳐 버렸다. 치우천왕은 즉시 하늘에 제사지내 천하의 태평을 맹세하였다. 다시 군대를 진격시켜 탁록을 에워싸 일거에 이를 멸망시켰다. <<관자>>가 말하는 바 '천하의 임금이 전장에서 한번 화를 내자 쓰러진 시체가 들판에 그득했다.'는 대목이 이를 말함이다.
때에 공손 헌원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토착 백성들의 우두머리였다. 처음 치우천왕이 공상에 입성해서 크게 새로운 정치를 편다는 말을 듣고 감히 저 혼자 즉위하여 천자가 될 뜻을 갖고 크게 병마를 일으켜 공격해와 더불어 싸우려 했으므로, 치우천왕은 먼저 항복한 장수 소호를 보내 탁록에 쳐들어가서 에워싸 이를 전멸시켰다. 헌원은 그래도 스스로 굴복치 않고 감히 백번이나 싸워오는지라. 치우천왕은 구군에 명을 내려 네갈래로 나누어 출동케 하고 자신은 보병 기병 3,000을 이끌고 곧바로 탁록의 유웅이라는 벌판에서 게속해서 싸우면서 명령을 내려 사방에서 압축하여 참살하니, 그 숫자를 셀 수 없었고 세지도 않았다. 또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치 못하게 하면서 싸음을 독려하니 적군은 마침내 두려움을 일으켜 혼란을 일으키고 도망가 숨으며 달아나니, 백리 안에 병사와 말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연의 회대의 땅을 모조리 점령하고자 하여 곧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지방을 점령하였다. 이에 헌원은 무리는 모두다 신하되기를 원하며 조공을 바쳤다. 대저 당시의 서쪽에 살던 사람들은 함부로 활과 돌의 함을 믿고 갑옷의 쓸모조차 알지 못했는데, 치우천황의 법력이 높고 강력함에 부딪쳐 마음에 놀랍고 간담이 서늘하여 싸울 때마다 매양 패했다.
<<운급헌원기>>라는 책에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구리로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라고 말한다>라고까지 썼으니, 역시 그 낭패한 모습이 대단했음을 상상해 알 것이다.
치루천왕은 더욱더 군대의 흠을 갖추고 사방면으로 진격했던바 10년동안 헌원과 싸우기를 73회였으나 장수는 피로의 기색이 없고 군은 물러설 줄 몰랐다.뒤에 헌원은 여러차례 싸웠으나 매양 졌으므로 원한은 더욱 더 커졌다. 군대를 일으켜 우리의 신시를 본따 크게 병기와 갑옷을 만들고 또 지의 수레도 만들어 감히 싸움터마다 출전하는지라. 치우천왕은 불같이 진노하사 노여움에 부들부들 떠시더니 형제와 종당들로 하여금 싸움의 준비에 힘쓰도록 하면서 위세를 떨처서 헌원은 군으로 하여금 감히 공격해 올 뜻을 품지도 못하도록 하였다. 더불어서 한바탕 싸움이 크게 일어나자 한 무리를 마구 죽여버린 후에야 비로소 멈췄으니 이 싸움에서 우리쪽 장수 가운데에 치우비아 하는 자가 있어 불행가게도 공을 서둘다가 진중에서 죽게 되었다. <<사기>>에서 말하는 <치우를 잡아 죽이다>라고 기록한 대목은 아마도 이를 말하는 것인 듯하다. 치우천왕은 크게 화가 나시어 군을 움직여 새로이 돌을 날려 보내는 기계를 만들어 진을 치고 나란히 진격하니 적진은 종내 저항할 방도조차 없었다. 이에 정예를 나누어 파견하여 서쪽은 예탁의 땅을 지키고 동쪽은 회대의 땅을 취하여 성읍을 삼게 하고, 헌원은 동쪽 침략의 길을 지키게 하였다. 치우천왕이 돌아가신 지 수천년이 된 지금 오히려 만장의 과열이 있어 능히 후인으로 하여그 흥분하여 떨쳐 일어나게 하는 듯하다. 지금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치우천왕의 능은 산동성의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 가운데에 있다고 한다. 높이가 7척으로 진나라와 한나라 때 주민들은 10월이면 늘 여기에 제를 지냈다고 한다.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 마치 필강 같은 것이 뻗는데 이를 치우의 깃발이라고 한다. 그의 영걸스러운 혼백과 사내다운 기백은 스스로 보통 사람과는 매우 다른 바가 천년의 세월을 지나서도 오히려 없어지지 아니 하는 듯하다. 헌원이 이로써 망연히 사라지니 유망도 이에 따라 영원히 떨어져 버렸다.
치우천왕의 공덕은 세상에 전하여 능히 떨치고 그윽한 푸르름 속에 그 명성 위엄을 떨어지지 않고 있음이라. 헌원이래로 세상은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베고 눕지를 못했다. <<사기>>에 으리되 <간을 뚫어 길을 내고 한번도 편안히 았은 적 없다. 탁록의 강에 도읍을 옮겨 다니며 항상 거처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장수와 사병을 시켜 지키게 하는 전장에서 살았난>라고 한 것은 아마도 헌원이 살았을 때 전전긍긍하던 모습을 역력히 보여주는 기록일 것이다. 또 <<상서>>여형예서는 '고훈에 다만 치우가 난을 일으키다 라고만 적은 것은 그의 위엄이 무서워 기를 빼았긴 탓' 이라고 하였다. 세상에 그의 훈을 전하는 까닭은 이로써 후인을 위하여 게명으로 삼자는 뜻도 역시 깊다. 그 뒤 300년은 별일이 없었는데 다만 전욱과 한번 싸워 이를 이겼을 뿐이다.
대저 신시개천에서부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이 흘러서 비로소 단군왕검이 나셨다. 웅씨의 비왕으로서 마침내 신시에 대신하여 구역을 통일하고 관경으로 삼한을 나누었으니 이를 단군조선이라고 한다.
<<삼한비기>>에서 말한다.
복희는 서쪽변방에 봉토를 받더니 직에 있으면서 정성을 다하였다. 무기를 쓰지 않고서도 한 지역을 감화시켜 마침내 수인에 대신하여 지역 밖에까지 명령을 내렸다. 뒤에 갈고한웅이 있었는데, 신농의 나라와 구역의 경계를 확정하여 공상 동쪽이 우리에게 속했다.
또 몇대를 지나 자오지천왕한웅에 이르다. 자오지한웅은 귀신 같은 용맹이 몹시 뛰어났고 그 머리와 이마는 구리와 쇠로 되었다.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고 구야를 만들어 주석과 쇠를 캐내어 무기를 만들고 돌을 냘려 목표물을 맞추는 기계를 만들었다.
천하는 이를 크게 두려워하고함께 떠받들어 천제의 아들 치우라 하더라. 저 치우란 말은 속어로 번개와 비가 크게 내려 산과 강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치우천왕은 신농씨가 쇠약해짐을 보고 미침내 뜻을 크게 품고 여러차례 천병을 서쪽으로 일으켜 진격하여 회대의 땅에 웅거했다. 헌원황제가 즉위함에 이르자 즉시 탁록의 벌판에 나아가 헌원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그를 신하로 잡은 다음에 오나라에 장군으로 보내 서쪽으로 고신씨를 공격하여 공을 세우게 하였다.
<<대변경>>에서 말한다.
'신시씨는 전으로써 계를 닦고 사람을 가르치고 하늘에 제 지내었다. 이른바, 전이란 사람이 스스로 완전이라 여기는 바를 쫓아 능히 그 성품에 통하고 이로써 참을 이루는 것이다. 청구씨는 선으로써 법을 만들고 사람에게 관경을 가르친다. 선이란 사람이 태어난 바를 따라 명을 알고 이로써 선을 넓힘이다. 조선씨는 종으로서 왕을 세우며 사람들에게 가르쳐 화를 공동으로 책임자게 하였다. 이른바 종이란 사람이 스스로 근본이라 여기는 바에 따라 능히 정신을 장 지키고 이로써 아름다움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은 허하면서도 하늘에 근본을 두고, 선은 밝음에 있으면서도 땅에 근본을 두며, 종은 건전하면서도 사람에 근본을 둔다.'
주에서 말한다.
'한인은 또한 천신이라고 한다. 천을 곧 큰 것이요, 하나이다. 한웅은 또한 천왕이라고도 하니 왕은 곧 황이며 제이니라. 단군은 또한 천군이라 하니,제사를 주재하는 우두머리이다. 왕검은 또한 바로 감군이며 관경의 우두머리이다. 때문에 하늘로부터의 밝음을 한환이라 하고 땅으로부터의 광명을 단단이라 한다. 이른바 한은 구한을 말하는 것이다. 한한은 곧 크다는 뜻이다. 삼한은 풍백우사운사라 한다. 가는 곧 가이다. 오가를 말하자면, 우가는 곡식을 주관하며,마가는 목숨을 주관하며, 구가는 형벌을 주관하며,저가는 병을 주관하며, 양가는 선악을 주관한다고 한다. 백성은 64종족이 있었고 무리는 3,000이 있었다. 세상을 다스리도록 내려 보낸 것을 개천이라 한다. 개천은 고로 능히 서물을 창조하는데 이것은 바로 허와 같은 것이다. 인간세상을 구한다함을 개인이라 한다. 개인은 때문에 능히 인간 세상의 일을 순환시킨다.이는 혼의 구연을 뜻한다. 산을 다스리고 길을 내는 것을 개지라 한다. 개지는 때문에 능히 셰상의 일들을 개화한다. 이는 지혜를 함께 닦음이라.'
<<삼한비기>>에서 말한다.
'대저 백두의 큰 산은 대황의 가운뎨 자리잡았으니 세로는 1,000리에 걸치고 높이 200리를 넘는다. 웅장하고 험준하니 울퉁불퉁 거창하여 배달천국의 진산이라 한다. 신인이 오르내림은 실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어찌 구구하게 묘향산이 다만 낭림의 서쪽을 달리는 산맥을 잇는 것으로써 능히 그와같은 성스러운 일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으리요. 세상의 속담에는 이미 묘향산을 가지고 태백산이라고들 한다. 즉 이를 보니 동쪼에 치우쳐 압록강이남의 한 구석을 차지한 땅일 뿐이라. 산의 조종을 곤륜산이라 떠들어 대며 기분 좋아하며, 소중화를 가지고 스스로 달래며 만족한다. 조공 올리는 사신이 북쪽을 들락거린 역사가 백년이다. 이를 치욕으로 알지 못하다니 이야말로 글을 폐하고 장탄식하는 이유어늘. 그런데 동방의 뭇산을 태백의 이름으로써 불리는 바가 사뭇 많다. 세속에는 영변에 있는 묘향산으로 그것을 가리킨다 하니 이것은 일연의 <<삼국유사>>의 설에 비롯하였음이라 이를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의 눈구멍은 콩알이라 할 것이요, 큰 콩알과 같다 할지언저. 이제 백두산 꼭대기에는 큰 연못이 있거늘 둘레가 80리이며 압록 송화 두만의 물줄기는 모두 여기에서 근원이 시작된다. 가로대 천지란 한웅씨가 구름타고 하늘로부터 내리신 곳이니 묘향산은 일찌기 한웅큼의 물구덩이조차 없었던즉 한웅천왕이 내려오신 땅을 태백산이 아니라고 함은 논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다.'
<<위서>>의 물길전에 '나라 남쪽에 도태산이 있다'라고 했는데 위에서는 이를 태황이라고 했다. 범 표범 곰 이리가 있지만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서 소변을 보지 않았고 길을 가는 이마다 모두 물건을 가득 채워가지고 가게 되니, 이는 아마도 한웅천왕께서 처음 하늘에서 내려오시사 이미 이산에 계시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이산을 신주흥왕의 영지라 하니, 반드시 소도제천의 옛 풍속은 반드시 이 산에서 시작되고, 옛부터 한족의 숭경도 역시 이 산에서 시작된 일이니, 단순히 심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또 짐승들도 빠짐없이 신의 교화로 목욕하듯하여 안락하게 이산에 서식하며 일찌기 사람을 상처낸 적 없고, 사람도 감히 산위에 오르지 않고 오줌 누어 신을 모독하지도 않으며, 항상 끝없이 공경하고 보호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대저 우리 한족은 신시가 이끄는 삼천의 무리들의 장막에서 나왔다. 후세 이후로 여러 씨성의 구별의 있다 하지만 실은 한단 한줄기 후예 후손에서 벗어나는자 없으며, 신시예 처음으로 내리신 공덕은 당연히 반드시 전송하여 잊지 말아야할진저! 곧 선왕과 선민들이 그 삼신고제의 성지를 가리켜 삼신산이라 함도 역시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다.
대저 선시 이래 신의 다스림과 성인은 교화는 점점 세월을 따라 오히려 더해 가며 점점 깊어간다. 나라를 세우고 세상을 다스리는 커다란 근본은 세상의 주변의 나라들과는 판이하게 달랐으니 그 신풍과 성속은 멀리 천하에 전파되었다. 천하만방의 사람들로서 신성이화를 흠모하는 자들은 반드시 삼산을 추모하고 숭상하여 동북쪽에 신며사라 불리는 곳이 있게 되었다. 그 말류의 폐단에 이르러서는 차츰 허랑방탕한 일에 빠져들더니 더 나아가서는 차츰차츰 더 기괴하고 황당무계한 설이 쉴새없이 튀어나오게 되었다. 여기에서 이른바 연나라 제나라의 바다위에 괴상한 도사얘기도 나왔다. 뎌저 저들의 땅이 구한의 신시와 서로 접해있어 문물의 교류도 왕성했던 터라 저절로 풍문에 접할 수 있어 괴기하다느데 놀랐던 게 아닐까? 게다가 상상으로 늘리고 부연하는 자도 있어 가로대 '삼신산은 봉래 방장 영주산으로 발해 가운데 있다 운운'함으로써 세사을 미혹하는 주요 원은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당시의 사람은 동쪼으로 바다에 가보아도 아득하기만 할 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발해 가운데 다른 바다가 있다는 말도 못 들었고,'삼신산도 역시 발해 가운데 있다 운운'했으나, 실은 바로 삼신산이 아니고 각각 세개의 섬예 있는 산이니 봉래는 쑥이 무성하게 자란 내경으로서 곧 천왕이 내려오신 곳이요, 방장은 사방 일장의 각으로서 곧 소도가 있는 곳이요, 영주의 영은 주도를 에워싸고 있는 모습으로서 곧 천지가 샘솓는 곳이다. 통틀어 말하자면 삼신산이라 하는 산이니 삼신은 곧 상제인 것이다.그렇지만 더욱 그 황탄한 자는 삼신의 원 뜻을 알지 못하고 곧 금강을 봉래산이라 하고, 지리산을 방장산이라 하고, 한라를 영주산이라 함이 모두 그런 따위이다.
<<사기>> 봉선서에서,'그것은 발해의 가운데 있다고 전한다. 아마도 일찌기 그곳에 갔다 온 자가 있는 듯, 모든 선인 및 죽지 않는 약은 고곳에 있다 하며, 그곳은 사물들과 짐승들까지 빠짐없이 흰색이요,황금과 백은으로 궁궐을 지었다.(....)라고 하였으며 또 <<선가서>>엔 가로대 '삼신산은 혼을 되살리고, 늙지 않게 하는 등의 약초가 있는데 일명 진단이라 한다.'라고 했다. 지금의 백두산은 옛부터 흰사슴,흰 꿩 등속의 짐승이 있었는데 <<괄지지>>가 말하는 바 '새 짐승 나무가 있으나 모두 희다'고 한 대목은 이를 가리킨 말일 것이다. 또 백두산 일대에선 많은 산삼이 나오는 바 세상 사람들이 이를 불로초라고 생각한다. 산사람들이 채취하려 할 때엔 반드시 먼저 목욕재계하고 산신에 제사를 지내고 난 후라야 감히 채취하러 입산한다. 아마도 혼을 디살리고 늙지 않게 한다는 말도 역시 생각컨대 여기에 근원한 것이라 여겨진다. <<세기>>에 가로대, '단군 오사구의 원년 북쪽을 순수할 때 영초를 얻다'라고 함은 곧 이것이라 여겨진다.
10월 제천은 마침내 천하만세의 풍습이 되었다. 이는 곧 신의 나라 특유의 성대한 행사로서 외국에는 이와 견중만한 것이 없다. 태백산은 홀로 곤륜산은 명성을 누르고도 남는다. 옛날의 삼신산이라 함은 곧 태백산으로서, 역시 지금의 백두산이다. 대저 그 옛날 신시의 인문교화는 근세에 이르러 건재하게 행해지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천경신고는 오히려 후세에 전해진 바가 있는 듯 거국적으로 남여가 역시 모두 말없는 가운데 받들고 있는 바로서, 곧 인간의 생사는 반드시 삼신이 주관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열살 미만일 때예는 묵숨의 안전과 위험,우환,잘나고 못남 따위는 애오라지 모부 삼신께 의탁한다. 저 삼신은 곧 우주를 창조하고 만물을 만드신 천일신이시다. 옛날 사마상여는 한나라의 왕 유철 무제에게 말하기를,'폐하께서 겸양하사 방탕하지 않으시면 삼신의 즐거움을 얻으실 것인즉'라고 했는데, 위소는 삼신상제에 주를 달아 '삼신은 설은 어느덧 저들의 땅에도 전파되었음이 명백하다'고 하였다.
<<진역유기>>에서 말한다.
'제의 풍속에 8신의 제가 있다. 8신이란 천주, 지주, 병주, 양주, 음주, 월주, 일주, 사시주,를 말한다. 천은 음을 좋아한다. 반드시 높은 산의 밑인 작은산 위에서 한다. 고 하늘을 태백산 기슭에서 제사미내는 유법인 것이다. 땅은 양을 좋아한다. 그래서 땅에 제사지낼 땐 반드시 못가운데의 네모진 언덕에서 제사지냄은 역시 곧 천을 참성단에서 제를 지내던 습성이라 할 것이다.'
'천주로서 삼신에 제사하고 병주로서 치우를 제사하니, 삼신은 천지만물의 조상이고, 치우는 만고무신으로서 용강의 조라 할지니, 큰 안개를 일으키고 물과 불을 마음대로 사용한다. 또 만세의 도술의 조종으로서 바람과 비를 부르고 모든 귀신들을 부른다. 이로써 태시의 세계에서부터 항상 천하전쟁의 주가 되었다.해대의 땅은 이미 엄 람 양 개 우 래 서 회의 8족이 자리잡고 사는 곳이 되었으니 곧 8신설은 8족으로부터 싹터서 당시에 번성하던 설이 되었다.
유방은 동이 게통의 인물이 아니라고 하지만 병사를 풍패에서 일으켰는데 곧 풍패의 풍속은 치우에게 제를 지내므로 나라도 역시 그 풍속을 따라 치우에게 제를 지냈다. 그리하여 혼고하고 깃발을 들고 마침내 10 월에 패상에 이르러 제후와 더불어 함양을 평정하고 즉위하여 한왕이 되었던바 이로인해 10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정하고 이것이 진나라의 정월 초하루를 빼앗는 일이긴 하나, 역시 동황태일을 받들어 공경하고 치우를 공경하여 제사지낸 때문이라 할 것이다. 뒤에 4년만에 진나라 땅이 이미 평정되니 축관에게 명하여 치우의 사당을 장안에 세우게 하였다. 그가 치우를 존경하기 이와 같았다.
진나라의 <<천문지>>는
<치우기는 꼬리별 혜성과 비슷하여 뒤가 꼬부라져서 깃발을 닮았다. 깃발이 보이는 곳 바로 밑에 병란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치우천왕이 승천하여 별이 되신 때문이다. 또 <<통지>>씨족략엔 <치씨는 치우의 후예>라고 했고 혹은 창힐은 고신과 더불어 역시 모두 치우씨의 후예이다. 대극성에 태어나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산동의 회북으로 옮겨 살았다>고 하였으니, 대저 치우천왕의 영풍위열함이 먼나라의 깊숙한 곳에 이르기까지 전파되었음을 이로써 미루어 알 수 있다.
연나라 제나라의 선비들이 신비하고 괴상스러운 소리에 탐닉한 지도 역시 오래 되었다. 제나라의 위왕과 연나라의 소왕때부터 사신을 파견하여 삼신산을 찾았으니, 진한 때의 송무기 정백교 극상 이문자고는 초하의 무리로서 연나라 사람들이요, 문성오리공 손경 신공의 무리는 모두 제나라 사람들이다.옛날 여상도 역시 치우씨의 후손이다. 때문에 역시 성은 강이다. 대저 치우는 강수에 살았다. 아들들을 모두 강씨라고 한 것이 아닐런지?
강태공은 제나라를 통치하기에 앞서 도술을 닦고 천제못에서 하늘에 제사지냈다. 그리하여 역시 제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으니 8신의 풍속이 이 땅에 더욱 번성하였다. 후세엔 그 땅에 도술을 잘기는 자가 많이 배출되어 신선 사상과 도가의 사상을 섞어서 널리 퍼뜨리고 또 다듬었으니, 바로 강태공이 이를 장려함이라. 일찌기 <<음부경>>의 주를 만들어 자부삼황의 뜻을 조술하였다. 그런즉 연나라 제나라 선비들이 어찌 괴상스럽고 신비스런 말들을 즐기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또 오행치수의 법과 <<황제중경>>이라는 책은 태자 부루로부터 나와서 우사공에게 전해진 것이다. 뒤에 다시 기자의 홍범을 주왕에게 말했다함은 역시 <<황제중경>>과 오행치수설인 것이니, 대저 그 학문의 근본은 신시의 구정과 균전으로부터 전해진 법일지라.
<<밀기>>에서 말한다.
'옛날엔 사람이 죽으면 향리를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합쳐서 한군데에 매장하고 표시하여 지석이라 하더니, 뒤에는 변하여 단을 만들고 지석단이라 불렀던 것이다. 또 제석단이라고도 했다. 산의 꼭대기에 있으며 산을 파고 성단을 만들어 놓은 것을 천단이라 했다. 산골짜기에 있고 나무를 심어 토단을 만든것을 신단이라 한다. 지금 승도들이 혼동하여 졔석을 단이라 부르는 것은 곧 옛고사를 말함이 아니다. 삼신을 지키고 사람의 목슴을 이치대로 하는 자를 삼시랑이라 하는데 본래 삼신의 시종랑이다. 삼랑은 본래 배달의 신하요 삼신을 수호하는 직책을 세습한 것이다.'
<<고려팔관잡기>>에서 말한다.
'삼랑은 배달의 신하이다. 씨뿌리고 재물을 주관하는 자를 업이라 하고, 교화하고 복종하게 함을 주관하는 자를 랑이라 하고, 무리를 모아 공을 이루는 것을 주관하는 자를 백이라 한다. 작 옛날에 시작된 신도이니 모두가 영을 받아 예언하는 일이 많은데, 하늘의 이치에 따라 종종 적중하기도 한다.지금 혈구에 삼랑성이 있는바, 성은 곧 삼랑이 머무르던 장소이다. 랑은 곧 삼신을 수호하던 관직이다.
불상이 처음 들어 오매 절을 세워 이를 대웅이라 불렀다. 이는 승도들이 옛것을 세습하는 칭호로서 본래의 승가의 말은 아닌 것이다. 또 가로대 승도와 유생이 모두 낭가에 에속되어 있다고 말함을 이로써 알 수 있다.혹은 말한다. 옛날엔 백성들이 계곡에 흩어져 살았으므로 장사지낼 정해놓은 땅이 없었다.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모두다 동굴로 옮겨서 천신과 나란히 모시고 이어 제사지냈다. 뒤엔 혹은 땅을 평평히하고 장사지내는 자도 있고, 둘레에 박달나무 버드나무 소나무 잣나무 등을 심어 이로써 표시를 하였다. 이는 신시의 시절엔 능이나 묘를 쓰는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후에 중고시대에 이르러 나라는 풍부해지고 민족은 강성하게 되었으니 점차 번거로워져서 장례를 사치스럽게 치르게도 되었고, 제사를 지냄에도 예의가 있었고, 묘를 쓰는 것도 자못 융성하게 되었다. 혹은 둥글게 혹은 네모나게 하여 지극히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장식하였으며, 높이 크기 넓이 폭 모지고 바른 것까지 규격이 생겼으며, 안쪽은 벽과 바깥쪽은 덮는 것까지 고르게 정밀하고 교묘하였다. 고구려에 이르러서는 능묘의 규격과 제도가 천하의 으뜸이 되었다.
삼한관경본기 제4
태백산은 북쪽을 달리는 산으로 높게 비서갑의 땅에 우뚝서 있다. 물을 뒤로 업고 산을 끌어 안고 있는데, 크게 둥그렇게 돌아 모이는 곳이 있으니 곧 대일왕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이라. 세상에 전하기를 ‘환웅천왕이 여기까지 순수하시사 사냥하시었기 때문에 그를 제사지내는 곳’이라고 한다. 풍백은 천부를 거울에 새겨 앞서 가고, 우사는 북을 치며 돌아가며 춤을 추고, 운사는 백검으로 호위하였으니, 대저 천제가 산에 임하실때의 의식은 이처럼 장중하였다. 산이름은 불함이라 하더니 지금은 또 완달이라 하니 그 음이 비슷한 바 있다. 뒤에 웅녀의 군이 천제의 신임을 받아 세습하여 비서갑의 왕검이 되었다. 왕검은 속어로 말하면 대감이니 땅을 관리하고 지키며, 포악함을 제거하여 백성을 돕는다. 천왕은 나라 사람들의 뜻을 살펴서 저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부모는 공경해야하며, 처자는 보호 양육해야 하며, 형제는 사랑하고 장노는 존경하고, 어리고 약한 자에겐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뭇 백성은 믿어야 하느니라.’고 하였다. 또 의약,공장,축산,농사,측후,예절,문자의 법을 제정하고 땅을 하나같이 평등하게 하여 이로써 잘 교화시키니 멀리 떨어진 백성들까지 모두 서로 의심치 않게 되었다. 웅씨가 갈려져 나간 자에 소전이라고 있었는 데 안부련 말기의 소전은 명을 받고 강수에서 병사들을 감독하게 되었다. 그의 환웅 아들 신농은 수 많은 약초들을 혀로 맛보아 약을 만들었다. 뒤에 열산으로 이사하였는데 낮에는 교역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편리하게 하였다. 소전의 별고에 공손이라고 있었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하였으므로 헌구로 유배시켰다. 헌원의 무리는 모두 그의 후손이다. 사와라환웅 초기의 일이다. 웅녀의 후손으로서 ‘여’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처음으로 단허에 책봉받아서 왕검이 되매, 덕을 심어 백성을 사랑하고 영토를 차츰 크게 넓히니 여러곳의 왕검들이 나아와 특산물을 바치며 이로써 귀화하는 자 천여명을 헤아렸다. 뒤에 460년이 지나 ‘신인왕검’이라 하는 이가 있었는데 크게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비왕이 되었다. 섭정하신지 24년에 웅씨의 왕은 전쟁하다가 붕어하시니 왕검은 마침내 그 왕위를 대신하여 구한을 통일하고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곧 나라의 인물들을 불러 약속을 세워 가로대,
‘앞으로는 백성의 뜻을 물어 공법을 만들고 이를 천부라 할지니, 그 천부란 만세의 강전이며 지극히 존중하여 아무도 이를 어길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삼한으로 나라을 나누어 통치하시니, 진한은 스스로 천왕께서 다스리시고 도읍을 아사달에 세우고 나라를 여시사 조선이라 하시고, 이를 일세 단군이라 한다. 아사달은 삼신을 제사지내는 곳인데, 후인들은 왕검의 옛집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왕검성이라 했다.
마한세가 상
곰무리과 범무리가 서로 다투던 옛날 환웅천왕께서 아직 군림하시기 전 묘한은 구황의 하나였다. 옛적 우리 환족이 유목 농경하던 때에 신시의 가르침이 열렸다. 땅으로써 다스리기 위하여 적을 하나로 하고 ,음은 십거를 세우고 양은 무궤를 만들고 충은 여기에서 생했다. 봉황은 날아모여들어 백아강에 살고 선인은 법수교로 오고 갔으니 법수는 선인의 이름이다. 사람과 문물이 어느덧 풍숙하였으니 때마침 이때에 자부선생께서 책력을 만드시고 삼황내문을 천폐에 진상하니, 천왕께서 이를 칭찬하였다. 삼청궁을 세우사 그곳에 거하시니, 공공,헌원,창힐,대요의 무리가 모두 여기 와 여기서 배웠다. 이에 윷놀이를 만들어 이로써 환역을 강연하니 대저 신지 혁덕이 적은 바로 천부의 유의 였다. 옛날 한웅천왕께서는 천하가 크다함을 아시고 한 사람이 능히 교화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하시며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사 곡식을 주관하게 하고, 생명을 주관하고 형벌을 주관하며 병마와 선악을 주관하게하고, 무릇 인간 세상의 360여사를 주관케 하시더라, 책력을 만드사 365일 5시간 48분 46초를 일년으로 하니 이것이 바로 삼신일체의 윗어른이 남긴 법이다. 고로 삼신으로써 가르침을 세워 뜻을 펴는 기치로 삼았ㄷ. 그 글에 가로대 ‘일신은 충에 내리고 성은 광명으로 통하니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에 따라 교화하여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고 했다. 이때 부터 소도가 세워지는 곳마다 산의 평상의 웅상을 보게 되었다. 산꼭대기에는 어디나 사방에서 온 백성들이 있었는데 동그랗게 둘러 부락을 이루었으니 네 집이 한 우물을 썼으며, 20분의 1세를 냈다. 해마다 풍년이 드니 언덕과 산에는 곡식이 쌓이고 이를 즐겨 춤추며 태백환무의 노래를 지어 이를 전했다.
계속하여 치우씨(bc 2707- )가 있었는데 구야를 만들어서, 광석을 캐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들고, 또 돌을 날리는 기계도 만들었다. 이에 천하는 감히 그에게 대적하는 자가 없었다. 때에 헌구가 굴복치 않으니 치우는 몸소 군대를 이끌고 출동하여 이를 크게 징벌코자 탁록에서 싸웠다. 탁록은 지금 산서성의 대동부이다. 싸움이 있기전에 탁록이 격문을 만들어 82종당의 대인을 소환했다. 먼저 치우의 형상을 그려 분포하더니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게 하고는 가로대 ,
‘그대 헌구야! 짐의 고함을 밝히 들으렸다. 해의 아들이라 함은 오직 짐 한사람뿐으로 만세를 위하고 공동생활의 옳음을 위해 인간의 마음을 닦는 맹세를 짓노라. 그대 헌구여! 우리의 삼신일체의 원리를 모독하고 삼윤구서의 행을 게을리 하였으니 삼신은 오래도록 그 더러운 것을 싫어하고 짐한사람에게 명하여 삼신의 토벌을 행하도록 하였으니 그대 일찌감치 마음을 잡아서 행동을 고칠 것이다. 자성은 너에게서 찾을 것이니 그대의 머리 속에 있음이로다. 만약 명령에 순응치 않는다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진노하여 그 목숨이 제 목숨이 아닐 것이다.
네 어찌 두렵지 않은가?’
라고 했다. 이에 헌구가 평정되어 복종하니 천하는 우리를 기둥처럼 여기더라.
때에 유위자가 묘향산에 숨어 살았으니 그의 학문은 자부선생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지나가다가 웅씨군을 알현하니 웅씨군은 ‘나를 위해서 도를 말하라’고 청했다.대답해 가로대
‘도의 대원은 삼신에서 나오나니 도란 도라고 할 것도 없으며 그 나타나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도라고 할 것이 있다면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며 나타남이 있다면 역시 도는 아닌 것이지요. 도는 항상 같은 것이 없고 때에 따르는 것이니 이에 도의 귀함이 있는 것일라, 나타남도 항상 똑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지 않아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나니 이에 나타남의 귀함이 있는 것이요, 그 겉모양이 크지도 않으며 그 속이 작지도 않는 것이 도니 이에 감싸지 못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늘에는 기틀이 있으니 내 마음의 기틀에서 볼 수가 있고, 땅에는 모양이 있으니 내 몸이 모양에서 볼 수가 있으며 , 사물에는 주관함이 있으니 내 기의 주관함에서 알 수가 있음이라. 이에 하나를 잡아도 셋을 포함함이며 셋을 모으면 하나도 돌아감인 것입니다. 일신이 내려옴은 사물을 다스림이니 바로 천일이 물을 낳은 이치요, 성품이 광명에 통함은 삶의 다스림이니 바로 지이가 붓을 낳은 이치요, 세상에 교화를 폄은 마음을 다스림이니 바로 인삼이 나무를 낳은 이치인 것입니다. 대개 대시에 삼신님은 삼계를 만드셨으니, 물은 하늘을 본뜨고 불은 땅을 본 떴으며 나무는 사람을 본 뜬 것입니다. 무릇 나무라는 것은 뿌리를 땅에 두고 하늘을 향하였으니 역시 사람도 땅을 밟고 서서 능히 하늘을 대신함이라’하니 임금께서는 ‘옳을시고 그 말씀이여!’ 하시더라.
단군왕검은 천하를 평정하시더니 삼한으로 나누어 관경을 만드시고 곧 웅백다를 봉하여 마한이라고 하였다. 달지국에 도읍하였으니 역시 백아강이라고도 불렀다. 마한산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하니 천왕께서 조서를 내려 가로대,
‘사람이 거울을 보면 그 곱고 미운 것이 저절로 나타난다. 백성들이 임금을 보면 그 치란은 정치에 나타난다. 거울을 보면 반드시 먼저 형체를 보고 임금을 보면 반드시 먼저 정치를 보느니라.’
라고 하니 마한은 글을 올려 가로대
‘거룩할 손 그 말씀이시여! 성주는 능히 대중의 뜻에 따르는 고로 길이 넓고, 무능한 임금은 즐겨 독선을 쓰는 고로 길이 좁사오니, 속으로 반성하여 게으름이 없을 것입니다.’
고 하다.
단군왕검 51년 천왕은 운사인 배달신에게 명하여 삼랑성을 혈구에 쌓고 제천의 단을 마리산에 만들었으니, 강남의 장정 8000인을 선발하여 이들에게 일을 하도록 하였다. 신유 3월 천왕은 몸소 마리산으로 행차하여 하늘에 제사지냈다. 웅백다가 재위 55년에 죽으니 아들 노덕리가 즉위하였다. 노덕리가 죽으니 그의 아들 불여래가 즉위하였다. 이 때가 단군부루 12년 임자 가을 10월이다. 명을 내려 칠회의 책력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듬해 봄 3월 처음으로 백성들을 가르치고 버들을 백아강에 심고 도정을 지었다. 병진년에 삼일신고의 비를 새겨 남산에 세우게 하다. 경신년에 도전을 일구고 기해년에 소도를 세우고 삼윤구서의 가르침을 폈다. 이에 치화가 크게 행해졌다.
단군가륵 제 3년 불여래가 죽고 아들 두라문이 즉위했다. 을사년 9월 천왕께서 칙서를 내려 이렇게 말하였다.
‘천하의 대본은 우리 마음의 중일에 있나니 사람이 중일을 잃으면 일은 성취되지 않는다. 물건으로 서 중일을 잃으면 물체는 곧 뛰죽박죽이 되나니 임금의 마음은 오직 위태롭고 뭇중생의 마음은 오직 어두울 뿐이다.전인은 통찰하여 골고루 한 가운데에 서서 잃는 일 없게 할 지며, 그런 후에라야 마침내 하나도 평정되나니라. 유중유일의 도는 아비가 되어서는 마땅히 자애롭고, 자식이 되어서는 마땅히 효성스럽고, 임금된 자로서는 마땅히 의로워야 하고, 신하된 자로서는 마땅히 충성스러워야 하며, 부부된 자로서는 마땅히 서로 공경해야 할지며, 형제된 자는 마땅히 서로 사랑해야 할지며, 노소는 마땅히 순서가 있어야 할지며, 친구된자는 반드시 신의가 있어야 할 지니라. 식신,공검,수학,연업,계지,발능,홍익에 서로 힘쓰며 성기,자유,개물, 평등하면 천하는 절로 맡겨도 된다. 마땅히 국가의 대통을 존중하여 나라 법을 지키고 각자가 맡은 바 직책에 힘써서 부지런히 산없에 힘쓸 것이다. 나라에 일이 생겼을 때는 몸을 던져 옳음을 따르며 힘껏 앞으로 나아간다면 만세의 무강한 나라를 이룸에 큰 힘이 되는 것이다. 이는 짐이 그대들 국인과 더불어 절절하게 행하여 바꾸는 일 없을 것이라. 성현 모두의 지극한 뜻이나니 다 받들어 공경할 것인저’ 락 하였다.
두라문이 죽었다. 아들 을불리가 즉위하였다. 을불리가 죽으냐, 아들 근위지가 즉위하였다. 이때가 단군 오사구의 을유년다. 경인년에 정정 30인 을 파견하여 선박을 살수에서 건조케 하였다. 곧 진한의 남해안이다. 임자년에 한은 명령을 받고 상춘에 들어가 구월산에서 삼신님께 제사지내는 것을 도왔다. 10월에 이궁을 모란봉의 중턱에 세워 천왕이 순수하다가 머무르는 장소로 삼다. 3월이 될 때마다 마한에 명하여 열병하도록하고 사냥하게 했다. 16일에 기린굴에 제천하고 조의를 하사하여 가관의 예를 행하였으며 가무백회 끝에 파하였다.
갑인년에 근우지가 죽자 아들 을우지가 즉위하였고, 을우지가 죽으니 동생 궁호가 즉위하였다. 궁호가 죽었는데 후사가 없으니 두라문의 동생인 두라시의 증손 막연이 명을 받아 마한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무신년에 단군 우서한은 백아강에 머무르면서 명하여 밭을 나누어 땅을 주어 네 가문을 한구로 만들게 하시고, 각 구는 일승을 내서 향토를 지키도록 하였다. 단군 노을제의 임인년에 막연이 죽었으니 동생 아화가 즉위하였다. 때에 단군 도해가 바햐흐로 개화할 것을 결심하고 평등하게 다스렸다. 명을 내려 대시전을 대성산에 세우고 큰다리을 대동강에 세웠다. 삼홀로 전을 삼아 경당을 설하여 칠회제신의 의식을 정하고 삼윤구서의 훈을 강론하게 하니, 환도의 문명이 번성함은 먼 나라까지 들려서 하나라의 왕 근이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 정사년 아화가 죽으니 아들 사리가 즉위하였다. 단군 아한의 을묘년에 사리가 죽으니 동생 아리가 즉위하였다. 단군 고불제의 을유년에 아리가 죽고 아들 갈지가 즉위하였다. 갈지가 죽으니 단군 대음제의 무신년에 갈지의 아들 을아가 즉위하였다. 기유년에 탐모라 사람이 말 30필을 바쳐왔다.
을아가 죽고 단군 여을제의 신미년에 아들 두막해가 즉위하였다. 임신년 3월16일 몸소 마리산에 행차하여 삼신을 참성단에서 제사하였으니, 하나라 왕 외임이 사신을 파견해 제사를 도왔다.
두막해가 죽으니 기축년에 아들 독로가 즉위하였다. 독로가 죽고 단군 고흘제의 경오년에 아들 아루가 즉위하였다. 아루가 죽고 무오년에 동생 아라사가 즉위하였다. 이 해에 고등이 모반을 일으켜 개성에 웅거하면서 천왕에게 항거했다. 마한이 드디어 군대를 일으켜 이를 토벌코자 하여 홍석령의 경계지점에 이르렀을 때 천왕께서 고등을 용서하고 우현황으로 삼았다는 소문을 듣고 곧 토벌을 멈추다.
을미년에 천왕은 해성에서 욕살 서우여에게 선양하시고자 하니 마한은 이의 불가함을 주장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우현왕의 아들 색불루가 즉위하니 마한은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끌고 나아가 해성에서 싸웠는데 싸움에 지고는 돌아오지 못하였다. (bc 1285 년)
마한세가 하
단군 색불루가 아버지께서 이루어 놓으신 힘을 계승하여 대벙을 장악하니, 진한은 스스로 무너졌고 나머지 두 한도 역시 이길 수 없어서 패해 버렸다. 전제는 사람을 시켜 옥책과 국보를 전하여 제의 자리를 물려 주었다. 새임금이 백악산에 도읍을 골라 세우니 여러 욕살들이 아무도 승복하지 않았으나. 여원흥과 개천령등이 명을 받아 저들을 설득했다. 이에 모든 욕살들이 빠짐없이 따르게 되었다.
병신원년 정월 마침내 녹산에서 죽위하니 이곳을 백악산 아사달이라고 한다. 3월에 조서를 내렸다.
‘ 그대들 아사달에 사람을 사람을 보내 옥책과 국보를 전함으로써 전제의 왕위를 선양케 하였느니라. 이제 이름을 세습하여 존귀함을 칭한다 하더라도 나라의 산천은 이미 그 이름이 장부에 실렸고, 제천의 예는 마땅히 나라의 법에 정한바니, 남용할 일이 아니다. 반드시 옛 실례를 따를 지니라. 이에 성실하게 공경을 다하고자 하는 자는 이제 마땅히 제사를 환영하여 이전의 제물들을 골라 삼가 신의 영역을 깨끗이 하고 정결히 한 후, 생폐를 갖추어 이를 가지고 삼신에 보답할지어다. ’ 이에 단제는 날을 택해 7일 동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에 향과 축문을 여원흥에게 내려 주었다. 16일 이른 아침에 경건하게 삼한의 대백두산의 천단에서 제사를 행하고, 단제가 몸소 백악산 아사달에 제사를 올렸다.
그 백두산의 서고문에 이르기를 ‘ 짐 소자 단군 색불루는 손을 모아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옵니다. 친히 천제의 아들로서 스스로를 닦고 이로써 백성에 미치게 하여 바드시 제천하고 공경하도록 하겠읍니다. 황상은 삼신의 밝은 명을 받으사 큰 덕으로 은혜를 베풀어서 이미 삼한 5만리의 땅을 주시고, 더하여 사람들에게 널리 이로움을 베풀어 누리도록 하셨으므로, 마한 여원흥을 보내어 삼신일체인 상제의 단에 제사 올리게 하였읍니다. 신은 밝고도 밝으신지라 물건에 근본이 되시어 버리심 없나니, 맑고 깨끗한 재물로써 정성드려 바쳐올리오니 내리시어 드시옵고 말 없이 도우시옵소서, 반드시 새 임금의 기틀을 도우시옵소서, 세세토록 삼한의 천만년 무강한 왕업을 보전하고 해마다 곡식이 풍성하여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풍족하게 하소서, 바라노니 밝으신 우리의 성제시여, 나를 비워서 만물이 있기를 염원하옵니다.’ 라고 하였다.
5월 제도를 개정하여 삼한을 삼조선이라 하다. 조선이란 관경을 말한다. 진조선은 천왕이 몸소 다스리고 땅은 곧 옛날의 진한대로 하고 저이는 천왕이 친히 다스리도록 하니, 삼한이 모두 하나같이 명령에 복종하였다. 여원흥에게 명하여 마한이 되어 막조선을 통치케하고 서우여로 하여금 번한을 삼아 번조선을 통치케 하였다. 이를 통틀어 이름하여 단군의 괸경이라 한다. 이것이 곧 진국으로 역사에서 단군조선이라 함은 이것이다.
여원흥이 이미 대명을 받아 대동강을 장악하니 역시 왕검성이라 한다. 천왕도 역시 매년 봄에는 반드시 마한에 머무르시며 백성의 근면하기를 정치로써 장려하였으니 이에 자공후렴의 폐단이 마침내 사라졌다. 이보다 앞서 조서를 내려 가로대 ‘ 생각컨대 짐 한 사람을 공양키 위하여 백성들을 들볶아 공물을 내게 함은 곧 정치가 없다는 말이니, 정치 없고서야 왕이 무슨 필요가 있으리오’ 하시고는 엄하게 명하여 이를 철폐하였다.
무자년 마한은 명을 받고 도읍에 들어와 간하기를 도읍을 영고탑으로 옮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불가하다고 하시며 이에 따르지 않았다. 여원흥이 죽으니 기축년에 아들 아실이 즉위하였고, 아실이 죽으니, 동생 아도 가 즉위했다. 기묘년에는 은나라가 망했다. 3년 뒤의 신사년 아들 서여가 거처를 태행산맥의 서북의 땅으로 피하여 가니 막조선은 이를 듣고 모든 주와 군을 샅샅이 조사하더니 열병을 하고 돌아왔다.
아도가 죽자 경술년에 아들 아화가 즉위하였고 아화가 죽자 병술년에 동생 아사지가 즉위했다. 아사지가 죽자 단군 마휴의 정해년에 형의 아들 아리손이 즉위하였다. 아리손이 죽으니 아들 소이가 즉위했고 소이가 죽으니 정해년에 아들 사우가 즉위했다. 무자년에 주나라왕 의구가 사신을 보내 신년을 축하 했다. 사우가 죽으니 갑진년에 아들 궁흘이 즉위하더니 갑인년에 협야후에게 명하여 전선 500척을 이끌고 가서 해도를 쳐서 왜인의 반란을 평정하도록 했다. 궁흘이 죽으니 아들 동기가 즉위하였고 동기가 죽자 단군 다물의 계유년에 아들 다도 가 즉위했다. 다도가 죽자 임진년에 아들 사라가 즉위하였고, 사라가 죽자 아들 가섭라가 즉위했다. 가섭라가 죽으니 아들 가리가 즉위하였는데, 을묘년에 융안의 사냥족들 수만이 모반을 일으켰다. 관병이 싸울 때마다 패하여 적이 마침내 심히 급하게 도성에 쳐들어오니 가리도 역시 출전하였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병진년에 상장구물이 마침내 사냥꾼들의 두목 우화충을 죽여버리고 도성을 장당경으로 옮겼다. 이보다 먼저 가리의 손자라는 이유로 전나가 들어가 막조선을 계승하니 이때부터 정치가 날로 쇠퇴하였다.
전나가 죽으니, 아들 진을례가 즉위했다. 진을례가 죽으니 을묘년에 아들 맹남이 즉위하였다. 무술년에 수유의 사람 기후가 병력을 이끌고 번한에 들어가 웅거하고, 자립하여 번조선왕이라 칭하였다.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우리와 함께 기후를 치자고 했으나 막조선은 따르지 않았다.
계해년 단군 고열가가 마침내 왕위를 버리고 아사달에 들어가셨다. 진조선은 오가와 함께 (진시황)정에게 복종하게 되더니 끝내 미처 회복하지 못한 채 종말을 맞았다.
번한세가 상
치우천왕은 서쪽으로 탁예를 정벌하고 남쪽으로 희대를 평정하셨다. 산을 뚫고 길을 내시니 땅 넓이는 만리에 이르더라. 단군왕검은 제요도당과 나란히 군림했다. 요임금의 덕이 날로 쇠퇴하자 서로 땅을 다투는 일을 쉬지 않았다. 천왕은 마침내 우순에게 명하여 땅을 나누어 다스리도록 병력을 파견하여 주둔시키더니 함께 요임금의 당나라를 치도록 약속하니 요임금이 마침내 힘이 딸려 순임금에 의지해 생명을 보전하고 나라를 양보하였다. 이에 순임금의 부자형제가 돌아와 같은 집에 살게 되었으니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공경스럽게 효도를 앞세우게 되었다. 9년 홍수를 당해 그 피해가 만백성에게 미치니 단군황검은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초청하여 도산에서 만났다. 순임금은 사공인 우를 파견하여 우리의 오행치수의 법을 배우게 하니 마침내 홍수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우를 낭야성 두어서 이로써 구여분정의 뜻을 정하였다. 바로 <서경>에서 말하는 바의 ‘동순하여 망제를 지내고 마침내 동후를 찾아뵙다’라는 기록이 바로 이것이다. 진국은 천제의 아들이 다스리는 곳이다. 고로 5년마다 순수하는데 낭야에 한번씩 이르른다. 순의 제후는 때문에 진한에 조근하기를 네번씩이었다. 이에 단군왕검은 치우의 후손 가운데 지모가 뛰어나고 세상에 소문난 자를 골라 번한이라 하고 부를 험독에 세우게 되었다. 지금도 역시 왕검성이라고 한다.
치두남은 치우천왕의 후손으로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게 세상에 알려졌다. 단군은 곧 불러보시더니 이를 기이하게 여기시고는 곧 그를 번한으로 임명하고 겸직하여 우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였다. 경자년에 요중에 열두개의 성을 쌓았으니 험독,영지,탕지,용도,거용,한성,개평,대방,백제,장령,갈산,여성이 그것들이다.
치두남이 죽으니, 아들 낭사가 즉위하다. 이해 경인 3월 가한성을 개축함으로써 예상하지 못했던 일에 대비하였다. 가한성은 일명 낭사성이라 하니 번한의 낭사에 세워진 때문이다.
갑술년에 태자 부루는 명을 받들어 도산으로 가는 길에 반달동안 낭사에 머무르며 민정을 청문했다. 우순도 역시 사악을 인솔하고 치수의 여러 일들을 보고하였다. 번한은 태자의 명을 받고 나라에 크게 경당을 일으키고 아울러 삼신을 태산에서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삼신을 받드는 옛 풍속은 희와대 지방사이에서 크게 행해지게 되었다.
태자는 도산에 이르러 일들을 주관했다. 곧 회합하여 번한을 통해서 우사공에게 가로대,
‘나는 북극 수정으 아들이니라. 그대의 왕이 나에게 청하기를 물과 땅을 다스려서 백성들을 도와 이를 구하려 한다 했는데 삼신상제는 내가 가서 돕는 것을 기꺼워 하시므로 내가 오게 된 것’이라고 했다. 마침내 천자으 땅의 글이 새겨진 천부왕인을 보이시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패용하면 곧 능히 험준한 곳을 다녀도 위험이 없을 것이며 흉한 일을 만나도 피해가 없을 것이다. 또 여기 신침 하나가 있나니 능히 물깊고 얕음을 측정할 수 있고 변화가 무궁무진할 것이다. 또 황거종의 보물이 있는데 대저 험요의 물 , 이것을 진압시켜 오래도록 평안케 하리라. 이 삼보를 그대에게 주노라. 천제의 아들의 대훈에 어긋남이 없으면 마침내 큰 공을 이룰지니라.’ 고 하였다. 이에 우나라 사공은 삼륙구배를 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천제아드님의 명을 게으름 없이 업으로 삼아 우리 우나라 순임금의 정치를 힘써 도와 삼신께 보답함은 크게 기꺼운 일로 반드시 그리하리이다.’ 라고 하였다. 태자 부루로부터 금간옥첩을 받으니 대저 오행은 치수의 요결이다. 태자는 구려를 도산에 모르고 우나라 순임금에게 명하여 곧 우공의 사례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지금의 이른바 우공이 그것이다.
낭사가 죽으니 계묘년에 아들 물길이 즉위하였다. 물길이 죽으니 갑오년에 아들 애친이 죽위하였다. 애친이 죽으니 아들 도무가 즉위하였고 도무가 죽으니 계해년에 아들 호갑이 즉위하였다. 정축년에 천왕께서 순시하사 송양에 이르러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번한이 사람을 보내 문상하고 병사를 보내 경예하도록 했다. 호갑이 죽으니 단군 달문의 기축년에 아들 오라가 즉위했다. 갑신년에 하나라왕 소강이 사신을 보내 새해 인사를 올렸다.
오라가 죽으니 병술년에 아들 이조가 즉위했다. 이조가 죽으니 단군 아술의 병인년에 동생 거세가 즉위했다. 거세가 죽고 신사년에 아들 자오사가 즉위했다. 자오사가 죽으니 을미년에 아들 산신이 즉위했고, 산신이 죽으니 무자년에 아들 계전이 즉위했다. 경인년, 명을 받아 삼신의 당 단을 탕지산에 세우고 관리들의 집을 옮기게 하다. 탕지는 옛날의 안덕향이다. 계전이 죽었다. 정사년 아들 백전이 즉위했고, 박전이 죽은 뒤 을미년에중제 중전이 즉위했고, 그가 죽자 신묘년에 아들 소전이 즉위했다. 갑오년에 장군 치운을 파견하여 탕을 도와 걸을 치게 하였다. 을미년에 묵태를 파견하여 탕임금의 즉위를 축하했다. 소전이 죽고 갑자년에 아들 사엄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동생 서한이 즉위했다. 서한이 죽으니 정축년에 아들 물가가 즉위했고 그가 죽은 뒤 신사년에 아들 막진ㅇ 즉위했다. 막진이 죽으니 정묘년에 아들 진단이 즉위했다. 이해 은나라 왕 태무가 찾아와 서 특산물을 바쳤다. 그가 죽으니 계유년에 아들 감정이 즉위하고, 그가 죽은 뒤에는 아들 소밀이 즉위하였다. 계사년에 은나라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가서 북박을 치게 하니 그 왕 하단갑이 이에 사죄하였다.
소밀이 죽자 아들 사두막이 즉위하였다. 사두막이 둑으니 계부 갑비가 즉위했다. 갑비가 죽고 경신년에 아들 오립루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아들 서시가 즉위했다. 그도 죽으니 무신년에 아들 안시가 즉위하였다. 그가 죽으니 아들 해모라가 즉위했다. 해모라가 죽고 단군 소태 5년 우사으 조정으르 번한에 임명하였다. 대저 고등이 항상 그 지모를 탄주하고 무리에 뛰어났기 때문에 제에게 권하여 임명하도록 한 것이라 때에 은나라왕 무정이 막 병사를 일으켜 치려하매 고등이 이를 듣고 상장 서여와 함께 이를 격파하고 추격하여 색도에 이르매 병사를 보내 불지르고 약탈한뒤 돌아왔다. 서여는 북박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병사들을 탕지산에 주둔케 하더니 자객을 보내 소정을 죽이게 한 후, 무기와 갑옷들을 아울러 싣고 돌아왔다.
번한세가 하
단군 색불루는 처음 삼한을 합치더니 나라의 제도를 크게 개역하였다. 은나라왕 무정은 사시을 파견하여 조공을 약속하였다. 이보다 앞서 서우여를 폐하여 서인을 삼았더니 서우여는 몰래 좌원에 돌아와 사냥군무리 수천인과 더불어 짜고 군대를 일으키니 개천령이 듣고 즉각 토벌하려 했으나 패하여 싸움터에서 죽고 말았다. 단제께서는 몸소 삼군을 이끌고 토벌하러 갔다. 이에 먼저 사람을 보내 서우여를 비왕에 봉할 것을 약속하시며 다시 설득하니 서우여가 이에 따르므로 단제께서는 서우여를 번한으로 삼으셨다. 4년 기해에 진조선은 천왕의 칙서를 전하였는데 가로대 ‘그대들 삼한은 천신을 위로 받들고 백성들도 이에 따르도록 교화하라’고 하다. 이때부터 백성들에게 예의,누에치기,베짜기,활쏘기,글 등을 가르쳤으며, 백성들을 위하여 금팔금법을 만들었으니, 남을 죽이면 같이 죽여서 다스리고, 남을 다치게 하면 곡식으로 배상케하고, 남의 것을 도둑질하면 남자는 신분을 무시해 버리고는 그집의 노비가 되게 하고, 여자는 계집종이 되게 하며, 소도를 훼손시키는 자는 가두어 두며, 예의 를 잃은 자는 군에복무하게 하고, 근면하게 노동하지 않는 자는 부역을 시키며, 음란한 행동을 하는 장ㄴ 태형으로 다스리고, 사기치는 자는 훈계방면하나 스스로 속죄하려 하면 사람들에게 아리는 것은 면하여 주지만 백성들이 오히려 수치스럽게 여겨서 결혼도 할 수 없었던 듯하다. 이로써 백성들은 끝내 도둑질 따위는 하지 않았으니 문을 닫거나 잠그는 일도 없었고 부녀자들은 정숙하여 음란하지 않았다. 밭이나 들, 도읍지를 막론하고 음식을 바쳐 제사올리니 어릴고 경먕하는 풍속이 가득했다.
병신년에 서우여가 죽고 정유년에 아락이 죽위하더니, 그도 죽었다. 정축년에 솔귀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갑자년에 임나가 즉위하였다. 신미년에 천왕의 조서로써 천단을 동교에 설치하고 삼신께 제사지내다. 무리들이 둥그레 모여 북치며 노래하기를 다음과 같았다.
진정으로 천단을 쌓고 삼신을 축수하세
황운을 축수함이여 만만세로다.
만인을 돌아봄이여 풍년을 즐거워하도다.
임나가 죽으니 병신년에 동생 노단이 즉위하였다. 북박이 쳐들어와 노략질하니 노일소를 보내 토벌하고 이를 평정케 하였다. 그가 죽으니 기유년에 아들 마밀이 즉위했다. 마밀이 죽으니 정묘년에 아들 모불이 즉위했다. 을해년에 감성을 두다.
모불이 죽으니 정해년에 아들 을나가 즉위하였다. 갑오년에 주나라 왕 하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을나가 죽으니 정묘년에 마휴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기사년에 동생 등나가 즉위했다. 이극희가 말씀올려서 소련,대련의 묘를 세워 삼년상의 제도를 정할 것을 청하니, 이에 따르다. 등나가 죽으니 무술년에 아들 해수가 즉위하였다. 임인년에 아들 물한을 파견하여 구월산에 가서 삼성묘에 제사지내게 하였으니 묘는 상춘의 주가성에 있다. 해수가 죽으니 기묘년에 아들 오문루가 즉위하였고, 그도 또 죽었다. 정묘년 아들 누사가 즉위하더니 무인년에 천자를 찾아 뵙고는, 태자 등올과 작은 아들인 등리가 별궁에서 한적하게 기거하고 있음에, 태자 형제들에게 노래를 바쳤다.
형은 반드시 동생을 사랑하고
동생은 마땅히 형를 공경할지니라.
항상 터럭 같은 일로서
골육의 정을 상하게 하지 말아요.
말도 오히려 같은 여물통에서 먹고
기러기도 역시 한줄을 만드나니
내실에서 비록 환락하나
세언일랑 삼가 듣지 마소서
누사가 죽으니 을미년에 아들 이벌이 즉위하였다. 병신년에 한수 사람 왕문이 이두법을 지어 바치니 천왕께서 좋다고 하시며 삼한에 모두 칙서를 내려 시행하였다. 기미년에 상장 고력을 파견, 회군과 합쳐 함께 주나라를 치게 하였다. 이벌이 죽으니 을축년에 아들 마휴가 즉위하였고, 그가 죽은 뒤 병진년에 아들 다두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기춘년에 아들 나이가 즉위했다. 그가 죽의니 기미년에 아들 차음이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을사년에 아들 불리가 즉위했고, 그도 죽으니 을사년에 아들 여을이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갑술년에 엄루가 즉위했다. 무인년, 흉노가 번한에 사신을 파견하여 천왕을 알현할 것을 청하여 신하로 봉함을 받고 공물을 바치고 돌아갔다. 엄루가 죽으니 아들 감릭 즉위했고, 그가 죽으니 무신년에 아들 술리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무오년에 아들 아갑이 즉위하였다. 경오년에 천왕은 사신 고유를 파견하시어 먼저 한웅,치우,단군왕검의 삼조의 상을 나누어 주시더니 이를 관가에 모시게 하였다.
아갑이 죽고 계유년에 고태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아들 소태이가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슬사년에 아들 마건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고 병진년에 천한이 즉위했다. 그가 죽으니 병진년에 아들 노물이 즉위하였고, 그도 죽으니 신사년에 아들 도을 이 즉위했다. 계미년에 노나라 사람 공구는 주나라에 가서 노자 이이에게 예를 물었다. 이의 아비의 성은 한이요, 이름은 건이니 그의 선조는 풍의 사람이라, 뒤에 서쪽으로 관문을 지나 내몽고로부터 이리저리 돌아 아유타에 이르러 그 백성을 개화시겼다. 도을이 죽고 병신년에 아들 술휴가 즉위했다. 그가 죽자 경오년에 아들 사양이 즉위하였고, 지한이 죽고 계묘년에 아들 인한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신사년에 아들 서울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으니 병오년에 아들 가색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경진년에 아들 해인이 즉위하였다. 일명 산한이라 했는데 이해 자객의 시해를 당했다. 신사년에 아들 수한이 즉위했다. 임오년에 연나라 사람 배도가 쳐들어 와서 안촌골을 공격했다. 또 험독에서도 노략질하니 수유의 사람 기후가 자식과 제자들 5000인을 데리고 와 싸음을 도왔다. 이에 군세가 떨치기 시작하더니 곧 진,번2한의 병력과 함께 협격하여 이를 대파하고, 또 한쪽으로 군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계성의 남쪽에서도 싸우려하니, 연나락 두려워하며 사신을 보내 사과하매 대신과 자제를 인질로 삼았다.
무술년에 수한이 죽었는데 후사가 없으매 이에 기후가 명을 받아 군령을 대행하였다.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이를 축하아였다. 이 해 연나라도 왕이라 칭하고 장차 쳐들어오려고 하였으니 기후도 역시 명을 받아 번조선 왕이라 칭하고 처음에는 번한성에 머무르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기후가 죽자 아들 기욱이 즉위했다. 기욱이 죽고 신미년에 아들 기석이 즉위했다. 이 해에 각 주군에 명하여 어질고 지혜있는 자를 추천하게 하니 일시에 선택된 자가 270인이었다. 기묘년 번한이 교회에서 몸소 밭을 가꾸었다. 을유년 연나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 기석이 죽고 경술년에 아들 기윤이 즉위하였고, 그가 죽자 기사년(bc 172)에 아들 기비가 즉위하였다. 처음 기비는 종실의 해모수와 몰래 약속하여 제위를 찬탈하여 했으니 열심히 명령을 받들어 보좌했다. 해모수가 능히 대권을 쥐게 된 것은 생각컨대 기비 그 사람 때문일 것이다.
기비가 죽으니 아들 기준이 즉위했는데 정미년(bc 146)에 떠돌이 도적인 위만의 꼬임에 빠져 패하고 마침내 바다로 들어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삼한관경본기 끝-
소도경전 본훈 제 5
蘇塗俓典本訓第五
신시 때에 선인 발귀리가 있었는데 대호와 동문으로 학문을 배우고 도를 이미 통하여 바야흐로 저와 산사이에서 노닐으니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아사달에서 제천의 예가 끝나는 것을 보고는 노래를 지었으니 그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대일 그 극은 이를 이름하여 양기라 하니,
없음과 있음이 섞여서, 빈 듯 하면서도 갖추어 묘함이 있도다.
삼일은 그체는 일이요, 그 용은 삼이라.
혼묘가 한 둘레에 있으니 체와 용은 따로 갈라질 수 없도다.
대허에 빛 있음이여, 이것은 신의 형상이고
대기의 오래도록 존재함이여, 이는 신의 화로서
참 목숨이 근원으로 만물이 여기서 나는도다.
해와 달의 아들은 천신의 충에 있음으로써 비추이고
이로써 원각을 긋고 능히 크게 세상에 내려오니
뭇중생이 그 무리를 이룬다.
원은 일이 되어 무극이고
방은 이가 되어 반극이며
각은 삼이 되어 태극이라.
무릇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함이란 천제 한웅에게 주어진 바니
일신은 내려와 충만하사 성은 광명에 통하고
제세이화, 홍익인간함은 이를 신시가 단군조선에 전하신 바이라.
한역은 우사의 관리로부터 나왔다. 때에 복희는 우사가 되어 여섯 가축을 기르게 하였으며 또 신용이 해를 쫒아가는 것을 살펴 하루에 열두번 색을 바꾸는 것을 보고 이에 한역을 만들었다. 한은 곧 희와 같은 뜻이고 역은 옛날 용자의 본 글자다.
한역의 체는 원이며 용(쓰임)은 방이다. 모양 없음으로부터 실을 알게 되니 이것이 하늘의 이치다. 희역의 체는 방이며 용은 원이자. 모양있는 것에서 그 변화를 아니 이것이 하늘의 체이다. 지금의 역은 서로 체이면서 용이니, 스스로 원이면서 원하고, 스스도 방이면서 방, 스스로 각이면서 각이라. 이것이 하늘의 명이다. 그러나 하늘의 원은 스스로 이것이 하나의 커다란 허무의 공일 뿐이니 어찌 체가 있다 하겠는가. 하늘은 스스로 본래 체가 없으면서 스물 여덟 가지의 별자리를 체로 한다. 대개 천하의 사물은 모두 이름을 갖고 이름 있는 것은 곧 모두 수를 가진다. 수가 있으면 곧 모두 힘을 가진다. 이미 수가 있다고 말함은 곧 유한과 무한의 틀리는 바 있음이고, 또 힘이 있다고 함은 곧 유형과 무형의 구별이 있음이니, 고로 천하의 사물은 말이 있으면 모두 있는 것이고, 말이 없으면 곧 없는 것이다.
천부경은 천제 한국에서 말로만 전해지던 글이니 한웅대성존이 하늘에서 내려온 뒤 신지 혁덕에게 명하여 녹도의 글로써 이를 기록케 하였다. 최고운 치원은 역시 일찌기 신지의 전문을 옛비석예서 보고 다시 이를 첩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게 된 것이다.
그렇거늘 본조에 이르러 뜻을 애오라지 유가의 글에 두더니 다시 조의와 더불어 의논하여 보존할 것을 바라지 않으니, 이 또한 한스러운 일이라! 때문에 특히 표하여 이에 내어 뒤에 오는 자에게 보이고자 한다.
천부경(81자)
일의 시작은 무에서 시작하니 일이라 삼극으로 석해도 본은 무진이니라.
천일은 일이요. 지일은 이요, 인일은 삼이라 일에서 적하여 십으로 거해도 화함에는 궤함이 없느니라.
천에도 이삼이 있고, 지에도 이삼이 있고. 인에도 이삼이 있나니, 대의 삼에 삼극이 합쳐서 육이 되니 일이삼을 합하면 칠팔구가 생긴다.
운의 삼은 사로써 성환하고 오와 칠은 일로써 묘연하여 만왕하고 만래해서 용변해도 본은 움직이지 않느니라.
천부경 팔십일자
일시무시일석삼극무진본
천일일지일이인일삼일적십게무괴화삼
천이삼지이삼인이삼대삼합육생칠팔구운삼사성환오칠
일묘연만왕만래용변부동본
본심본태양앙명인중천지일
일종무종일
<<삼황내문경>>은 자부선생이 헌원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맘을 씻고 의에 돌아오게 한 것이다.
선생은 일찌기 삼청궁에 사셨으니 궁전은 청구국 대풍산의 남쪽에 있었다. 헌원이 몸소 치우를 배알했는데 가는 길에 명화를 거치게 되어 소문을 듣게 된것이다. 경문은 신시의 녹서로 기록되어 세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후세 사람들이 추연하고 주를 더하여 따로 신선음부의 설이라고 한 것이다.
주나라 진나라 이래로 도가의 무리들에 의지하는 바가 되어 민간에 연단복식하는 자가 생기고 허다한 방술의 설이 어지럽게 마구 나와서 의혹에 빠지는 자가 많았다. 서복에 이르러 한나라는 망했지만 역시 희사의 출신이기에 평소 진나라을 배반할 뜻이 있었으니, 이에 바다로 들어가 신선을 찾는다고 말로는 하고 도망쳐 들어가지 않았다. 일본의 기이에 서불이라는 제명의 각자가 있다. 이국의 신궁에는 서불의 묘지요 사당이 있다. 서복은 일명 서불이니 불은 복의 음이 혼동된 것이다.
<삼일신고>는 본디 신시개천의 시대에 나와서 책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대저 하나를 잡아 셋을 포함하고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옴의 뜻으로근본을 삼는다. 5장으로 나뉘어져 천신조화의 근원과 세상사람들과 사물들의 교화를 상세히 쓴 것이다. 그 일에는 [허공은 일로 함께 시작되지만 같지않고, 일에서 시작하여 끝나지만, 끝을 같이 함이 없다. 밖은 허하고 안은 공한 가운데 항상함이 있다.]라고 하였고, 그 이예서는 [일신은 헛것은 가고 실재가 나타나서 모든것을 주재하는 듯하나 삼신이 대제로서 실로 공이 있음이라]하였으며, 그 삼에서는 [천궁은 진아의 거처하는 곳이라. 만 가지 착함을 스스로 갖추어 영원토록 쾌락이 있으리라]고 하였다. 그 사에서는, [세계의 뭇별은 해에 속해 있으니 모든 백성들과 큰 인물들이 여기에서 태어난다] 라고 하였다. 그 오에서는, [사람 물건은 같이 삼신에게서 나와 하나의 참으로 돌아가나니 이를 대아라 한다]라고 하였다. 세상에서는 혹은 <삼일신고>를 가지고 도가의 제사지낼 때 올리는 말씀이라고도 하지만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우리 한국은 한웅으로부터 개천하여 천신에게 제사지내고 신고를 조술하였으며, 산하를 널리 개척하였고 백성을 교화하였다.
오호라, 신시는 천황께서 세우신 이름으로 이제 이미 삼신상제께서 열으신 끝없는 큰 은혜를 받아 웅호를 잘 다스려서 이로써 세상을 안정시켰다. 위도는 천신을 위해, 홍익으 뜻을 높이하고, 아래로는 세상사람을 위해 무고의 원을 푸나니 이에 사람은 절로 하늘에 순종하여, 세상엔 거짓과 망령됨이 사라지니, 하는 바 없이도 절로 다스려지고 말 없어도 절로 교화되었다. 풍속은 산천을 족중하여 서로 간섭하거나 침범하지 않고 서로 굴복함을 귀하게 여겼으며 목숨을 던져 남의 위급을 구제하였다. 이미 먹는 것과 입는 것이 고루 나누어졌지만 또 권리를 평등하게 하였다. 함께 삼신에게 돌아가 위지하여 서로 기쁘게 맹세하고 원을 세웠다. 화백으로 의견을 모으고, 서로 함께 책임지는 것으로 믿음을 지켰으며, 힘을 모아 일을 쉽게 하였고 직업를 나누어 서로 도왔으니 남녀가 모두 그 직분이 있었고 늙은 이와 어린 아니도 똑 같이 복과 이익을 누였다.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어 재판하는 일도 없었으며 나라들끼리 서로 침입하여 빼앗는 일도 없었으니 이를 일러 신시태평지세라고 한다.
삼일신고(총366자)
제1장 허공(36자)
제 가로대, [너희들 오가의 무리들아. 파아란 것이 하늘이 아니며 까아만 것이 하늘인 것은 아니다. 하늘은 얼굴과 바탕이 없으며 첫끝과 맞끝도 없으며, 위 아래와 사방도 없고 겉은 황 하며 속은 텅 하여 있지 않은 데가 없으며, 싸지 않은 것이 없나니라.
제2장 일신(51자)
신은 위 없는 첫 자디에 계시사 큰 덕과 큰 슬기와 큰 힘을 가지사 하늘을 내시며, 셈 없는 세계ㅕ를 차지하시고 많고 많은 물건을 만드셨나니 팅ㄹ 만치도 빠진 것이 없으며, 밝고도 영하여 감히 이름하여 헤아릴 수가 없다. 소리, 김으로 원하여 빌어도 친히 보임을 끊나니 성품으로부터 씨를 찾으라. 너의 머리 끝에 내려 계시나니라.
제3장 천궁(40자)
천은 신국이라, 천궁이 있어서 온갖 착함으로 섬돌을 삼고 온갖 덕으로 문을 삼나니 일신께서 계시는 곳이요, 신장과 선관들이 모셨나니 크게 좋으며 크게 빛난 곳이라. 오직 성품을 트고 공적을 이룬 이라야 널리 영원토록 쾌락을 얻을지니라.
제4장 세계(72자)
너희들 총총히 벌린 별들을 보라. 셈이 다함이 없고 크고 적음과 밝고 어두움과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 갖지 않으니라. 일신께서 묻 세 계를 만드시고 또 일세계의 사자를 시켜 700세계를 거느리게 하시니, 너희 땅이 스스로 큰 듯 하나 한 둥그런 세계이니라. 땅속 불이 울리어서 바다가 변하여 육지가 되었고 이에 보이는 모양을 이루었느니라. 일신께서 김을 불어 싸시고 밑까지 해의 빛과 더움을 쪼이시니, 기고 날고 되고 심는 물건들이 번식하니라.
제5장 인물(167자)
사람과 만물이 한가지로 삼진을 받나니 생각하면 사람들은 땅에서 헤매어 삼망이 뿌리를 내렸고 진과 망이 서로 삼도를 지었다.
가로대 성품과 목숨과 정기라. 사람은 온전하고 만물은 치우치니라.
참성품은 착함도 악함도 없으니 상철이 통하고, 참목숨은 맑음도 흐림도 없으니 중철인이 알고, 참정기는 두려움도 엷음도 없어 하철인이 보전하니, 참으로 돌이키면 일신이 될지니라.
가로대 심과 기와 신이라. 심이 성에 의지하녀 선악을 이루나니 선은 복이 되고 악은 화가 된다. 기가 명에 의지하여 청탁을 이루나니 맑은 것은 오래가고 탁한 것은 쉬 사라진다. 심이 정에 의지하여 두텁고 엷음을 이루니라. 두터움은 귀하고 엷음은 천하다.
가로대 느낌과 숨쉼과 부딪침이라. 굴러 열여덟 지경을 이루나니 느낌에는 기쁨 두려움 슬픔 성냄 탐함 싫음이요, 숨쉼에는 향내 술내 추위 더위 번개 습기요, 부A딪침에는 소리 빛 냄새 맛 음탕 다침이니라. 뭇사람은 착하고 악함과 맑고 흐림과 두텁고 엷음을 서로 섞어서 가닥길을 따라 함부로 달아나다가, 낳고 성장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괴로움에 떨어지고, 철인은 느낌을 그치며 숨쉼을 고르며 부딪침을 금하여 한 뜻으로 되어가서, 가닥을 돌이켜 참함에 나아가서 큰 고동을 여나니, 성품을 트고 공적을 완수함이 이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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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비사>는 단군 달문때의 사람 신지 발리가 지은 것이다. 본래 삼신께 올리는 옛제사에서 서원의 글이다.
저 상고 제천으 참 뜻은 백성을 위하여 복을 기원하고 신을 축복하여 나라를 일느킴에 있다. 지금 호사가는 <신지비사>를 가지고 도참성점과 서로 혼돈시키고 수를 추리하여 부연해서 말하기를 그것은 <진단구변도>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구결로 예언하는 것의 본보기라고 하는데 잘못된 말이다.
말하기를 [저울대는 부고량이다]라고 했으니 곧 진하늬 옛서울을 말한다. 역시 곧 단군조선이 도읍한 곳으로서 아사달이 그곳이니, 즉 지금의 송화강의 하르빈이다. [또 저울의 추는 오덕지]라 함은 번한의 옛서울을 말함이니 지금 개평부 동북 70리에 있는 탕지보가 그곳이다. 또 고려사에 말하기를 [저울그릇은 백아강이라]고 했으니 이는 마한의 옛 도읍지를 말하며 지금의 대동강이다.
곧 마한의 웅백다가 하늘을 마한산에서 제사했다 함은 곧 이것이다. 삼가 삼한의 지세로써 여러가지 형석에 비교해보면 부소량은 나라의 저울대와 같고, 오덕지는 나라의 추와 같고, 백아강은 나라의 저울그릇과 같으니, 세가지 가운데 하나를 빼면 저울은 물건을 달 수 없고 나라는 백성을 보존치 못하리니, 삼신고제의 서원은 다만 삼한의 관경에 있는 백성을 기쁘게 하는데 뜻이 있다. <신지비사>의 전하는 바도 역시 이에 벗어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즉 나라를 위하여 뜻을 하나로 하고 아울러 충성과 옳음을 아울러 장려하고, 제사하여 신을 기쁘게 하여 보이 내리기를 빈다면, 신은 반드시 가득히 내리고 복은 반드시 나라를 행하게 할 것이다. 진실로써 행한다면 일을 함에 있어서, 실행하여 이루지 못하였다고 추궁할 수가 없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추궁함과 아루는 것이라, 어느 것을 공이라 할 것인가?
우리나라의 문자는 옛부터 있었나니 지금 남해현 낭하리의 암벽에 신시의 옛조각이 있다. 부여사람 왕문이 쓴바의 법류부의전과 자부선생의 내문과 태자 부루의 오행은 모두 한단시대에 나옴 것이다. 그렇다면 은학과 한문은 아마도 왕문의 유범일진저!
유기에 [신획 일찌기 태백산의 푸른 바위의 벽에 있었거늘] 이라는 글이 있다. 그 모양은 ㄱ 과 같으니 세상에서는 신지선인이 전한 것이라고 말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를 글자를 만든 것의 시작]이라고 한다. 곶 그 획은 직일과 곡이라 하는 모양이다. 그 뜻은 관제의 모양도 있다. 그 형과 소리는 계획된 바가 없지 않은 듯하니 생각컨재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고로 신인의 덕애로써 사람 세상을 고르게 하니 이에 담된 가릋딤이 행해지고 결국 세상의 일이 모두 바로 된다. 현능한 사람은 벼슬에 있고 노유는 공개적으로 봉양 양육하며 장년은 의에 복종한다. 많은 사람이 감화되니 간사한 자는 소송을 그치고 창칼은 음모의 문을 닫는다. 이것 역시 이화의 한 길이다.
대변설의 주에 말하기를 [남해현 낭하리의 계곡의 바위위에 신시의 고각이 있다. 그 글에, <한웅이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리다>라고 있다]고 했다. 또 가로대 [대시에 옛것을 전함에 있어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만 의지한지 오래이다. 나중에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고 또다시 그림이 변하여 문자가 되었다. 대저 문자의 근원은 나라의 풍습에 믿음을 존중하는 것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하나의 기로부터 셋으로 갈려진 기는 곧 극이다. 극은 즉 무다. 저 하늘의 근원은 곧 삼극을 꿰뚫어 허가 되고 빈 것이다. 안과 밖도 역시 그런 것이다. 하늘의 궁을 곧 빛이 모이는 곳, 만 가지 변화가 나오는 곳이라 한다. 하늘의 일신은 능히 그 허를 체로 할 뿐 아니라 곧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고로 말한다. 일기는 즉 천이며 곧 빈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중일의 신이 있어 능히 삼이 된다. 삼신은 곧 천일 지일 태일의 신이다. 일기는 그가 스스로 능히 동작하여 이루고, 가르치고, 다스리는 삼화의 신이 된다. 신은 죽 기이고 기는 곧 허이며, 허는 즉 일이다. 고로 사람에 삼진이 있다. 성명 정의 삼수의 진이라 한다. 진은 즉 충이고, 충은 곧 업이고, 업은 곧 속이며, 속은 즉 일이다. 그리하여 일에서 시작하여 일에 끝난다는 것은 돌아서 진으로 되오는 것을 말한다. 곧 일은 즉 삼이라고 하는 것은 선에 대합하는 것이다. 미립의 작은 알갱이를 쌓아서 일로 되돌아 오는 미이다. 곧 성의 선이라 하는 것이고 곧 명의 청이라 하는 것이며, 곧 정의 후라고 하는 이유다. 다시금 또 무엇이 있어서 있다고 하고 없다고 하는 것일까? 진은 이를 <물들지 않음>이라고 한다. 이 물듦을 망이라 하고 선을 불식이라 한다. 그 식을 악이라 하고 청을 불산이라 한다.
산을 탁이라 한다. 후를 불축이라 한다. 축을 박이라 한다. 하나를 잡아 삼을 머금은 이유는 곧 그 기를 하나로 하며 그 신을 셋으로 하기 때문이라,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 하는 이유는 곧 그 기를 하나로 하며 그 신을 셋으로 하기 때문이라,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하는 이유는 역시 신을 셋으로 하고 기를 하나로 하기 때문이다. 저 삶을 사는 자의 체는 일기이다. 일기란 안에 삼신이 있고 지의 근원도 역시 삼신에 있다. 삼신은 밖으로 일기를 포함한다. 그것은 밖에 있는 것은 일이고 내용도 일이며 그 통제도 일이다. 역시 포함되어 있을 뿐 놓을 수 없다. 그것이 글자가 이루어진 근원이 된다. 회를 포함하고 잡고 돌아온다.는 뜻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신시엔 신목이 있었고 치우에게 투전목이 있었으며 부여엔 서산이 있었다. 그 산목이라하는 것은 1234567890 이다.
또 전목은 1234567890 이다. 단군 갸륵제 2년 삼랑 을보록이 정음 38자를 찬하고 이를 가림다라고 했다 한다. 그 글을 보면 이렇다.
ㅣ ㅡ ㅏ ㅓ ㅜ ㅗ ㅑ ㅕ ㅛ ㅠ X ∋
ㅇ ㄱ ∪ ㅁ ㄴ △ ㅈ ㅊ ∧ ∧ ㆆ ∧ M
ㅁ ∪
ㅣ⊃ ㄹ ㅐ ㅒ ㅡ ㅡ ∧ ㄱ ㅜ ㅠ
△ ㄱ ㅈ ∧ ㅡ ㅡ ㅍ
※주 :산목과 투전목은 1부터 10까지를 나타태는 그림문자나 기호였다.
가림다는 훈민정음 28자를 모두 포함한 옛 소리글자이다.
<이태백전서>의 옥진총담에는 [발해국에 글이 있는 바 당나라에서는 아무도 이를 해득하는 자가 없었다. 이태백은 능히 이를 풀어 이에 대답했다]하고 있다. <삼국사기>엔 [헌강왕 12년의 봄 북진으로부터 적국인이 진에 들어와 나무 조각을 나무에 걸어 놓고 갔음을 상주하고는 마침내 그 나무에 쓰여진 15자를 취하여 바쳤는데 <보로국과 흑수국의 사람이 함께 신라국과 화통하고자 왔노라>고 써져 있다]고 했다. 또 고려의 광종 때 장유는 접반사로서 저명한 사람이다. 처음 난을 피해 오월에 이르었다. 월씨에 호사가가 있었으니 동국한송정의 곡을 거문고 바닥에 새기고 이를 파도에 띄워 보냈다. 월나라 사람들은 그 글을 풀지 못하더니 때마침 장유를 만나 절하고 그 글의 뜻을 물으니, 장유를 만나 절하고 그 글의 뜻을 물으니, 장유는 즉석에서 한시로써 이를 풀었다.
달빛 소나무에 하얀 밤.
파도까지 잠든 경포의 가을
애처로이 울며 오가는
한마리 바다 갈매기여!
아마 거문고 바닥에 각문한 글은 옛 가림다 종류의 글이었을 것이다.
원동중의 <삼성기>의 주에 [왜 진 여국은 혹은 휭서하고 혹은 결승하고 혹은 계목한다.]고 있다.
애오라미 고려만이 영법을 모사했으니, 생각컨대 한단의 상고시대엔 반드시 문자의 모각이 있었을 것이다.
최치원은 일찌기 신지의 옛비석에 새겨진 천부경을 얻어 다시 또 첩를 만들고 이로써 세상에 전했으니 낭하리의 조각은 바로 모두 그 실체의 자취이다.
세상엔 전하기를 [신시에는 녹서가 있고 자부에겐 우서가 있고 치우에게는 화서가 있어, 투전문 등은 즉 그 남은 흔적이다. 복희에겐 용서가 있었고 단군에겐 신전이 있었으니 이들 글자들은 널리 백산 청구 구려등에 쓰여졌다]고 했다.
부여사람 왕문은 처음 전문을 번거롭다 여기고 좀 그 휙을 없애고 새로 부예를 만들어 사용했다.
진나라때 정막은 속신에 사신으로 왔다가 왕문의 예법를 한수에서 얻었고, 또 그 휙을 계승하여 조금 바꾼형으로 고쳤다. 그것이 지금의 팔분이다.
진나라의 왕차중은 또 해서를 만들었는데 그는 왕문의 먼 후예이다. 지금 글자의 근원으로 삼는 것을 탐구해 보면 모두 신시에서 전해진 법이며 지금의 한자도 그 지류를 계승한 것이 명백하다.
<삼일신고>의 구본에는 분장이 없고 행촌선생이 처음으로 장을 나누어서 1장에 허공,2장에 일신, 3장에 천궁, 4장에 세계, 5장에 인물이라 했다.
저 허공을 하늘의 질량이라 하고, 일신을 하늘의 주재라 하고, 천궁을 하늘의 조화를 갖춘 곳이라 하고, 세계를 만세라 하였다.
인물은 곳 시(市)이다. 인물은 우주의 삼계의 원훈이다. 대저 태백진교는 천부에 근원하여 지전에 합치고 또 사람의 일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정사를 일으킴에 있어 화백보다 앞섬이 없고, 덕을 다스림에 있어 책화보다 선한 것이 없다. 재세이화의 도는 모두 천부에 준하여 거짓이 없고, 지전을 취하여 게으름이 없고, 인정에 합쳐서 어긋나지 않는다면, 천하의 공론이 어찌하여 한 사람인들 아니라 할 자 있으리요?
신고의 5대지결도 역시 천부에 바탕을 둔 것이다. 신고도 역시 천부 가운데 하나의 이상에 다름 아닌 것이다.
처음으로 자의 근원이 오래됨을 알았다. 글자의 의미는 크고도 크도다.
세상에 전하는 바 목은 이색 휴애 범세동은 모두 천부경을 주해 했다고 하는데 그렇지만 지금은 볼 수 없다.
지금의 풍속은 한자라 할지라도 정주에 합하지 않으면 뭇화살의 집중적인 비난을 받을 정도로 유가의 예봉은 바햐흐로 번득인다.
저 천경과 신고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하여도 어찌 쉽사리 논할 수가 있으리요?
신시의 음악을 공수(貢壽)라 하거나 공수(供授)라 하기도 하고 또 두열이라고도 한다.
무리를 둘러서서 줄지어 합창으로써 삼신으로 하여금 크게 기쁘시게 하고, 나라가 번영하고 민심이 윤택해 질 것을 빌었다.
<백호통소의>에서는 조리라 했고 <통전악지>에서는 주리라 하였고 <삼국사기>는 도솔이라 했다. 대저 즐겁고 건강하기를 신에게 기원하고 순리를 따라 족함을 안다는 뜻이 있음을 안다는 뜻이 있음이라.
단군 부루 때 어아의 악이 있었으니, 대저 신시의 옛풍습으로 , 삼신을 맞는 노래였을 것이다. 즉 가로대, 대조신을 삼신이라 부르고 하늘의 주재자라고 하였다.
고로 태양으로써 의상을 삼고, 광열로써 공능으로 삼고, 화복보응으로써 정의로 삼는다. 이때부터 풍속은 참전으로 계를 가졌다, 예복에도 법칙이 있었으니 의관한자는 반드시 활과 화살을 차고, 잘 쏘는 자는 반드시 높은 자리를 얻었다.
마음을 착하게 가짐을 수업의 근본으로 삼고, 과녁을 가상의 악귀의 우드머리로 삼았다.
제사는 반드시 조심하여 근본에 보답함을 알게하고. 한마음으로 뭉쳐서 스스로 여러 목숨 가진 것들을 가까이하여 교화하였다.
안으로는 닦고 겉으론 겸손하여 모든 것이 때에 알맞아 배달국의 영광은 백백천천년이 되게 쌓여서 높아질 것이니, 이 커다란 은덕을 어찌 한 순간인들 잊을 수 있을 손가?
옛날에는 무천의 악이 있었다. <요사>예지에 말하는 바의 요천과 같은 것은 이것을 말한다.
이제사는 반드시 먼져 생을 상징시켜 평상시 살아있을 때 처럼 정성을 드리려고 한다. 신주를 세우고 상을 차리고 공물을 올리는 것은 곧 친견을 표하려 하는 의식이다.
멀리 지나간 일을 되새겨서 근본에 보답함은 곧 금생을 거듭하여 뒤에까지 계속하여 보전하고자 뒤에까지 계속하여 보전코자 하는 가르침이다.
<<대변경>>에서 말한다. 단군 구물은 국호를 바꿔 대부여라 하고 수도를 장당경으로 바꾸었다. 지금의 개원이며 역시 평양이라고도 한다. 삼조선의 칭호는 단군 색불루에게서 시작된다. 그렇더라도 아직 완전하지 못하더니 이에 이르러 갖추었다. 삼한이란 분조관경의 뜻이 있으니, 삼조선이란 분경관경제도가 있다는 말이다. 먼저 큰 가르침은 매우 복잡하였으니 사람들이 능히 행하지 못하였고 연나라의 침입이래 전화가 여러차례 있어 왔다. 해를 거듭하여도 일은 잘 풀리지 않으니 치화를 잃고 국력은 날로 약해져 갔다. 어느날 단제께서는 꿈에 천제의 가르침을 얻으셨다. 이에 다스림을 크게 바꾸려고 했다. 천제의 묘 마당에 큰 나무를 세우고 북을 매어 달도록 하고 3,7을 기한으로 하여 연령순으로 서로 마시면서 권화하여 성책하였다. 이를 구서의 모임이라 하고 항상 구서의 글을 사용했다.
한번 절한 뒤에 무리에게 말한다.
“너희들 집에서는 효함에 게으름 없을지며,집에 부모처자 있거든 곧 성심성경하여 밀어줌에 우애로써 할지니라. 제사를 성심껏 받들어 이로써 하나의 근본에 보답할지며, 손님을 경접하여 이로써 이웃과 사이 좋도록 힘쓸지며, 자제를 가르침에 게으름 없이하여 영재를 기르면 이것이 모두 인륜 교화의 큼이라. 이것이 효도하고 자애롭고 순종하고 예의 바름이느 이를 감히 수행치 않겠는가?”
이에 무리는 일제히 소리로 응해 가로대
“그리하오리다. 못하겠다 하는 자는 이를 추방하겠나이다.”
라고 하였다.
두번째 절하고 서약하여 말한다.
“너희들 형제엔 우애 있기를 힘쓰라. 형제는 부모가 갈라진 것이요, 형이 좋아하는 것이면 동생이 좋아하는 것이어야 하고, 동생이 좋아하지 않는 것이면 형도 좋아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물래(物來)의 좋아함 좋아하지 않음은 다른 사람도 나도 서로 같나니라. 몸으로부터 물건에 이르고 친함으로부터 서먹한 사이에 이르기까지라. 이러한 길을 가지고 이를 조국에 미치게 하면 조국은 흥융할 것이며, 이를 천하에 미치게 하면 곧 천하는 교화될 것이니라. 이것이 우애와 화목과 어진 것과 용서함이아. 이를 감히 수업하지 않겠다 하겠는가?”
무리는 소리로 응하여,
“그리하오리다. 아니라 하는 자는 내어 쫒으리이다.”
라고 하다.
세번째 절하고 서약하였다.
“너희들 스승과 벗에 믿음 있기를 힘쓰라. 스승과 벗응 도와 법이 서는 곳이라. 덕과 의는 서로 연마하고 과실은 서로 경계하라. 학문의 세움과 사업의 성취는 모두 스승과 벗의 힘이라. 이것이 믿음과 진실함과 성실함과 근면함이라. 이를 감히 수행치 않을 수 있을까?”
이에 무리들 소리 맞춰,
“예 거부하는 자는 추방하오리다”
하였다.
네번째 절하여 맹세한다.
“너희들 나라에 충성하기를 힘쓰라. 나라는 선왕께서 세우신 것이라. 지금 백성들이 먹고 사는 곳이라. 국정을 쇄신하고 나라의 부를 늘리고 국토를 수호하고 국권을 회창하고 국세를 굳혀 역사를 빛나게 함은 모두 나라의 책임이라. 이것이 충과 의와 기개와 절개이니 이를 감히 연마할 수 없다 하겠는가?”
이에 무리는 소리 맞춰,
“지당한 말씀입니다. 아니라 하는 자는 추방하오리다.”
하다.
다섯번째 절하며 맹세하기를,
“너희들 묻사람에게 겸손하기를 힘쓰라. 만인은 모두 천제의 백성이라. 나와 같이 모두 세 가지 참됨을 받아 주성의 바탕을 이룬 바이며 나라힘의 원천이 되는 바라. 위가 겸손치 않으면 밑이 떨어져 나갈 것이요, 바른쪽이 겸손치 않으면 왼쪽은 이탈하고 앞이 겸손치 않으면 뒤는 후퇴할지며, 아래가 겸손치 않으면 위는 싫어하고, 왼쪽이 겸손치 않으면 바른쪽은 떨어지고, 뒤가 겸손치 않으면 앞은 서먹해지리라. 이제 겸손하여 양보하고 서로 존경하면 군중이 화합하여 힘이 뭉쳐져서 외부로부터의 모욕 따위는 없어지고 안으로는 다스림을 이루리라.이것이 겸손과 겸양과 공경과 삼가는 것이라. 이를 감히 수행치 않으리오?”
하니 무리는 소리내어,
“옳소이다. 아니라는 자는 쫒아내리이다”
하다.
여섯번째 절하며 맹세하기를,
“너희들 정사를 밝게 아는 일에 힘쓰라. 정사는 난리를 다스리는 것에 관한 일이라. 풍백은 약속을 세우고, 우사는 이를 정무로 시행하고, 운사는 형을 행하여 각각 직권이 있어 서로 침범치 못할 것이다. 지금 지혜와 보는 눈은 고매하고 언로는 널리 열렸으며 기예를 잘 연마하였고 경험을 쌓아나가면, 즉 나라일은 균등히 될지며 백성들의 일은 열리리라. 이것이 밝음과 지혜와 통달과 살핌이라. 이를 감히 수행치 않겠는가?”
하니 무리는 소리내어 가로대,
“옳습니다. 거부하는 자는 추방하오리다.”
고 하였다.
일곱번째 절하여 맹세하여 말하길,
“너희들, 싸움터에서는 용맹할 것을 힘쓰라. 싸움터는 존망이 결정되는 곳이라. 나라 있지 않으면 임금도 아비도 떨어져서 나무 우상처럼 되리니, 주인이 서지 않으면 처저는 몰락하여 노예가 되느니라. 사람의 일이나 물건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의 길이 아님이 없고, 세상에 전하는 가르침도 역시 나의 일이 아닌 것이 없도다. 나라 없으며 살고 주인 없으면서 존재함이 차라리 나라 있을 때 죽고 주인이 있을 때 죽고 끝나는 것과 같겠는가? 이제 확연하게 자기를 비워 희생시키는 풍속있으니, 정숙하게 규제하여 잘 스스로 무리를 다스리고 상과 벌은 반드시 바르고 공평하게 할 것이다. 남과 내가 역시 믿음으로 서로 돕는다면 많은 사람들을 양육하고 능히 천만의 사람을 복되게 하리라. 이를 용기와 담력과 힘과 의협이라 하느니, 이를 감히 수행치 않겠다 하겠는가?”
하니 무리 소리내어 가로대,
“옳습니다. 거부하는 자 그를 쫓으리다”
라고 하였다.
여덟번째 절하며 맹세하여,
“너희들 행동함에 있어서는 청렴하기를 힘쓰라. 청렴하지 않으면 양심은 절로 어둡고 능히 청렴하면 신명이 저절로 트이리라.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욕심을 내면 반드시 중풍을 앓을지며, 스스로 만족하면 스스로 해를 입고 남에게도 해를 끼치게 된다. 이런 일이 계속해서 쌓이면 구제 받지 못하는 곳에 ㅃㄴ지리라. 이것이 겸손함과 곧음과 깨끗함과 맑음이라. 이를 감히 수행치 않겠는가?”
하니 무리들 소리내어 가로대,
"수행하오리이다. 거부하는 자는 추방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아홉번째 절하며 맹세하여 말하길,
“너희들 직업에 있어선 의로움에 힘쓰라! 사람이 직업을 갖고 일을 행하면 반드시 책임이 있나니, 조금이라도 불의가 있거든 스스로 힘을 다하여 물리치지 못한다면 반드시 업신여겨 학대받고 무너져버릴 것이며, 만약 정의롭다면 백성들로 하여금 다 믿도록 하리니, 누가 있어 능멸하고 모욕하고 침탈하리오? 의는 단체의 힘이 샘솟는 곳으로서 바른 기운이 일어나는 곳이라. 이를 잘 갈무리하면 한몸에 간직할 수 있지만, 이를 확대하면 천지에 가득채운다. 이것이 바름과 옳음과 공평함과 도리이니 이를 감히 수행치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무리 소리내어 외치기를,
“옳소이다, 거부하는 자는 이를 추방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풍속은 순박하고 도타운 것을 숭상하고, 의로운 싸움에 용감하고,공동의 이익에 힘쓰며,공동의 일에는 민첩하며,공덕에는 밝았다. 선업은 권하고 과실은 바로잡고 스스로 예의있고 자애로운 풍속을 이루어 같이 삼신께 돌아와 의지하여 교화되었다.
<<단군세기>>에서 말한다.
'엄지손가락을 교차시키고 바른손을 올린 뒤에 삼륙대례를 행한다.' 엄지손가락을 교차시킴은 바른 엄지는 자(子)를 나타내고, 왼엄지는 해(亥)를 나타내기 때문이다.그리고 바른손을 더함은 태극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다. 옛날에는 꿇어 앉기에 앞서 반드시 먼저 읍을 한 후 꿇어앉았으니 바로 보통의 예의이다. 읍은 이를 가리켜 취(聚)라 한다. 마음을 모아 하늘을 생각한다. 꿇어앉음은 순(順)이다. 기를 순하게 하고 무릎을 합쳐서 땅에 감사하는 것이다. 배(俳)는 헌(獻)이다. 몸을 바치고 머리를 땅에 대며 선조에 보답하는 것이다. 헌은 또 현(現)이라고도 한다. 머리가 손에 닿는 것을 배수라 하고 머리가 땅에 이르름을 고두라한다. 고두는 곧 이마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굽혀 절하는 것이다.
<<참전계경>>이 세상에 전해진 것은 을파소 선생이 전한 것이라 한다. 선생은 일찌기 백운산에 들어가 하늘에 기도하고 천서를 얻으니 이를 <<참전계경>>이라 했다. '대시에 철인은 위에 계시사 인간의 360여사를 주재하시었다. 그 강령에 8조가 있나니 성誠 신信 애愛 제濟 화禍 복福 보報 응應이라 한다.성은 충심이 발하는 것으로서 진실에서 나오는 정성을 관장하는 곳이라, 6체와 47용이 있고, 신은 천리의 필합으로서 인사의 필성이라, 5단 35부가 있다. 애는 자심慈心의 자연으로 인성人性의 본질이다. 6범梵과 43위圍가 있다. 제는 덕의 겸선으로서 도가 잘 미치는 것이라,4규規 32모模가 있다.화는 악이 부르는 것이다. 6조條 42목目이 있다. 복은 선의 여경(여경)이다. 6문門 45호戶가 있다. 보는 천신이 하는 것으로 악인에 보하는데 있어서는 화로써 하고 선인에 보하는 데 있어서는 복으로 한다. 6계階와 30급及이 있다. 응이란 악은 악보를 받고 선은 선보를 받음이라. 6과果 39형形이 있다. 고로 하늘은 비록 말은 없으나 척강하여 두루 보호한다. 나를 아는 자는 이를 열심히 찾아서 열매를 맺으리니, 하나같이 온전함에 이르고 모든 서람이 계를 받음이라.'
을파소가 덧붙여서 말했다.
'신시이화의 세상은 8훈으로써 경을 삼고 5사를 위로 삼아 교화가 크게 행해져 홍익제물하였으니, 참전이 이뤄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지금의 사람들은 이 전계에 의해 더욱 더 스스로에 힘쓸지면,백성들을 잘살게 하는 일이 어찌 어려운 일로 될까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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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국 본기 제6
高句麗國 本紀 弟六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부터 나오나니 해모수의 어머니의 고향 역시 그곳이다. <<조대기>>에선 이렇게 말한다. [해모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웅심산에서 일찌기 살다가 부여의 옛서울에서 군대를 일으켜 무리에게 추대외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니 이를 부여의 시조라고 한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관을 쓰고 용광의 검을 차고 오룡의 수레를 탔다. 따르는 시종이 오백여명이 있었는데 아침엔 정사를 듣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니 호령하지 않아도 절로 관경이 교화되었다. 산에는 도적이 없고 벼와 곡식이 들에 그득했다, 나라에 큰 일 없고 백성 또한 일 없었다. 단군해모수가 처음 하늘에서 내려오심은 임술(BC )4월 초 여드레로서 곧 진시황 정의 8년이다. ]
고리군의 왕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며 옥저후 불리지는 고진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한 공을 세워 봉함을 받은 바라. 불리지는 일찌기 서쪽 압록강변을 지나다가 하백녀 유화를 만나 그녀를 맞아 들여 고주몽을 낳게 하였다. 때는 곧 임인(BC 79) 5월 5일이라. 곧 한나라왕 불능의 원봉2년이다. 불리지가 죽으니 유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왔으니 지금의 서란이다. 주몽이 성장하여 사방을 주유하다가 가섭원을 택하여 거기서 살다가 관가에 뽑혀 말지기로 임명되었다. 얼마 안되어 관가의 미움을 사서 오이와 마리외 협보와 함께 도망하여 졸본으로 왔다. 때마침 부여왕은 후사가 없었다. 주몽이 마침내 사위가 되어서 대통을 이으니 이를 고구려의 시조라 한다. 32년 갑오(BC 27)10월 북옥저를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을미년에 졸본으로부터 서울을 눌현으로 옮겼다. 눌현은 지금의 상춘 주가 성자이다. 유리명제의 19년 또 눌현으로부터 국내성으로 옮겼으니 또한 황성이라고도 한다. 성안에 환도산이 있는데 산 위에 성을 쌓고 일이 있으면 여기에 머물렀다. 대무신열제의 20년, 제는 낙랑국을 습격하여 멸망시켰으니, 동압록 이남이 우리에 속했는데 애오라지 해성의 남쪽, 바다근처의 여러 성들만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다. 산상제의 원년 동생 계수를 파견하여 공손탁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현도와 낙랑을 정벌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대변경에서 말한다.
‘고주몽성제는 조서를 내려 가로대,<천신께서 만인을 만드실 때에 하나의 상으로서 균등하게 삼진을 주시었으니 이에 사람은 저 하늘을 대신하여 능히 세상에 서게 되었다>라고 하셨다. 하물며 우리나라의 선조는 북부여에서 나와 천제의 아들이 되었다. 밝은 이의 마음이 비어 고요함은 계율에 뿌리를 두는 것이니 오래도록 사특한 기운을 눌러 그 마음이 안락하고 태평하다. 이에 뭇 사람과 함께 일하면 항상 잘되는 것이라. 병력을 쓰는 까닭은 침범을 느슨하게 하려함이요. 형을 행함은 죄악을 없앨 것을 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허가 지극하면 정이 생기며, 정이 지극하면 지혜가 가득하며, 지혜가 지극하면 덕이 융성하다. 때문에 마음을 비워 가르침을 듣고 고요한 가운데 헤아리며 지혜로써 사물을 이치대로 하고 덕으로써 사람을 다스린다. 이것이 곧 신시의 개물교화이다. 천신을 위해서는 성품을 열고 중생을 위해서는 법을 세우고, 선왕을 위해서는 공을 다하고, 천하만세를 위해서는 지와 생을 나란히 닦는 교화를 이룸이라.'
을파소는 국상이 되더니 나이어린 준걸들을 뽑아서 선인도랑이라 하였다. 요화를 관장함을 참전이라 하였으니, 무리들을 선택하여 계를 지키고 신을 위하는 일을 맡겼다. 무예를 관장하는 자를 조의라 하였으니 바른 행동을 거듭하여 규율을 만들고 공동을 애하여 몸을 바친다. 일찌기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신시이화의 세상은 백성들의 지혜가 열림에 따라서 날로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만세에 걸쳐서 바꿀 수 없는 표준이 되는 이유가 되다. 때문에 참전엑 계가 있으니, 신의 계시에 따라 무리를 교화하고, 한맹에 율이 있으니 하늘을 대신하여 공을 행한다. 모두가 스스로 마음을 써서 힘을 모아 뒤에 공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라고 했다. 을지문덕은 말한다.
'도는 이로써 천신을 섬기고 덕은 이로써 백성과 나라를 덮는다. 나는 이런 말이 천하에 있음을 안다. 삼신일체의 기를 받아 이를 나누어서 성명정을 얻으니 광명을 마음대로 하고 양연하여 움직이지 않으나 때가 되면 감동이 일어나니 도는 이에 통한다. 체가 삼물인 덕혜력을 행하고 삼가인 심기신이 되며 즐겨 삼도인 감식촉을 채우는 이유이다. 그 중요함은 날마다 재세이화하고 조용히 경도를 닦아 홍익인간함을 간절히 생각함에 있다.
한국은 5훈을, 신시는 5사를, 조선은 5행6정을, 부여는 구서를 말한다.삼한의 통속도 역시 5계가 있어 효충신용인이라 한다. 모두 백성을 가르침에 있어 올바름과 공명함을 가지고 무리를 정리함에 뜻이 있다.‘
<<조대기>>에 가로대 ‘동천제도 역시 단군이라 한다. 한맹의 절기가 될 때마다 삼신을 평양에서 제사하여 맞이한다. 지금의 기림굴은 즉 그 제사지내던 곳이다’라고 했다. 크게 맞이하는 의식은 처음에는 수혈에서 행해젔다. 구제궁에 조천석이 있었으니 길을가는 사람은 누구나 볼 수 있었다. 또 삼륜구덕의 노래가 있어 이를 권장하였다. 조의선인은 모두 선택되었으니 국인이 그 선출됨을 긍지로 여기는 바였다.그렇지 않다면 영광으로써 왕의 사자와 동등하게 여겼겠는가?‘
광개토경호태왕은 융공성덕하여 어느 왕보다 탁월했다. 사해안에서는 모두 열제라고 칭한다. 나이 18세에 광명전에서 등극하고 하늘의 음악을 예로써 연주했다. 군지에 나아갈 때마다 병사들로 하여금 어아의 노래를 부르게 하고 이로써 사기를 돋우었다. 말을 타고 순수하여 마리산에 이르러 참성단에 올라 친히 삼신에게 제사지냈는데 역시 천악을 사용하였다.
일단 스스로 바다를 건너서는 이르는 곳마다 왜국사람들일 겨파하였다. 왜인은 백제의 보좌였다. 백제가 먼저 왜와 밀통하여 왜로 하여금 신라의 경계를 계속해서 침범하게 하였다. 제는 몸소 수군을 이끌고 웅진 임천 와산 괴구 복사매 우슬산 진을례 노사지 등의 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도중에 속리산에서 이른아침 제천하고 돌아오다. 때에 곧 백제 신라 가락의 여러나라가 모두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고 거란 평량도 모두 평정 굴복시켰다. 임나와 이왜의 무리는 모두 신하로써 따르지 않는자가 없었다. 해동의 번성함은 이때가 그 극성기이다. 이보다 앞서 협보는 남한으로 도망쳐 마한의 산중에 살았다. 그를 따라온 자도 수백가였는데 몇해 지나지 않아 큰 흉년에 시달려 유리하고 방황했다. 협보는 장혁을 알고 무리를 유혹하여 양곡을 도둑질하여 배에 싣고 패수를 따라 내려와 해포로부터 몰래 항해하여 곧바로 구야한국에 이르니 곧 가라해의 북안이다. 여기서 수개월 동안 살다가 아소산으로 옮겨가서 기거했다. 이를 다파라국의 시조라한다. 뒤에 임나를 병합하여 연정을 세워 이를 통치케하다. 3국은 바다에 있고 7국은 뭍에 있었다. 처음 변진구야국의 사람들이 한때 모여 산적이 있었는데, 이를 구야한국이라 한다. 다파라를 다라한국이라고도 한다. 홀본으로부터 와서 고구려와 일찌감치 친교를 갖고 있었으스로 늘 열제의 통치를 받았다. 다라국은 안라국과 함께 이웃하여 성이 같다. 본래 웅습성을 갖고 있으니 지금 구주의 웅본성(구마모또 시로)이 그것이다.
왜는 회계군의 동쪽 동야현의 동쪽에 있으며 배로 9000리를 건너 나패에 이르른다. 또다시 1000리를 건너서 네시마에 이르른다. 네시마는 도시마라고도 한다. 때에 구노인은 여왕과 서로 싸워 길을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 구야한국으로 가고자 하는자는 쯔시마,가라산,지가도로부터 비로소 말로호자의 경계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동쪽 경계는 곧 구야한국의 땅이다. 회계산은 본래 신시의 중경이 간직된 곳이다. 사공 우가 재계하기 사흘만에야 겨우 치수의 비결을 얻어 공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에 우는 돌을 벌채하여 부루태자의 공을 산의 높은 곳에 새겼다고 한다. 즉 오월은 본래 구려의 옛 읍이며 산월 과 좌월은 모두 그 후예가 옮겨 산 땅이다. 항상 왜와 왕래하며 무역하여 이익을 얻는자가 매우 많았다. 진 때 서불은 동야현의 해상으로부터 곧바로 나패에 이르러 다네시마를 거쳐 세도나이까이를 따라 처음으로 기이에 이르렀다. 이세에 옛날 서복의 무덤이 있었다. 어떤이는 말한다. ‘단주는 서복이 있던 곳’이라고도.
장수홍제호태열제는 건흥이라고 연호를 바꿨다. 인의로써 나라를 다스려서 강역을 널리 넓혔다. 이에 웅진강 이북이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어 북연 시위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족속의 서열에 들어오게 되었다. 또 신라 매금 백제 어하라와 남쪽 평양에서 만나 납공과 수비 군사의 수를 정했다.
문자호태열제는 명치라고 개원하였다. 11년 제노오월의 땅은 고구려에 속했다. 이에 이르러 나라의 강토는 더욱 커졌다.
‘평강상호태열제는 담력이 있고 말을 타고 활쏘는 것을 잘 했으니, 곧 주몽의 풍이 있었다. 대덕으로 개원 하더니 잘 다스려 밝게 교화했다. 대덕 18년 병신 제는 대장 온달을 보내 갈석산 배찰산을 토벌하고 추격하여 유림관에 이르러 북주를 크게 격파하니, 유림진 동쪽은 모두 평정되었다. 유림은 지금 산서성의 경계이다.
영양무원호태열제때 천하는 크게 다스려져 나라는 부하고 백성은 성했다. 수나라왕 양광은 본래 선비의 유종족인바, 남북의 땅을 통합하여 그 여세를 모아 우리 고구려를 모욕하고 업신여기더니, 상국을 업신여기고 자주 대병을 일으켰으나 고구려는 이미 대비가 있어 한번도 패한적이 없었다. 홍무 25년 양광은 또다시 동쪽으로 침략해와서 먼저 장병을 보내 비사성을 여러겹으로 포위케했다. 관병은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니 바햐흐로 평양을 습격하려 했다. 제께서는 이를 듣고 완병술을 쓰려 했다. 계략을 꾸며 곡사정을 보냈다. 때마침 조의 가운데 일인이라는 자가 있어 자원하여 따라가기를 청한 끝에 함께 표를 양광에게 바쳤다. 양공이 배에서 표를 손에 들고 읽는데 절반도 채 읽기 전에 갑자기 소매 속에서 작은 활을 꺼내 쏘아 그의 뇌를 맞혔다. 양광은 놀라 자빠지고 실신했다. 우상 양명은 서둘러 양광을 업게하여 작은 배로 갈아타고 후퇴하여 회원진에 명을 내려 병력을 철수시키도록 하였다. 양광은 좌우에 말하여 가로대 ‘내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몸소 작은 나라를 쳐도 승리하지 못하니 이는 만세의 웃음거리가 아니겼는가?’
라고 했다. 양명 등은 얼굴색이 검게 변하여 대답 못하고 말았다. 후인들은 이를 노래로 불러 가로대,
오호 어리석은 한나라 어린애들아
요동은 향하지 마라.개죽음이 부른다.
문무의 우리 선조 한웅이라 불렀느니
자손들은 이어져서 영웅호걸 많단다.
주몽 태조 광개토님
위세는 세상에 울려 더할나위 없었고」
유유 일인 양만춘은
나라 위해 못 바꿔 스스로 사라졌다
세상문명은 우리가 가장 오래니
오랑캐 왜구 다 물리치고 평화를 지켰다.
유철 양광 이세민도
보기만해도 무너져서 망아지처럼 도망갔다.
영락기공비는 천 척
만가지기가 한 색으로 태백은 높단다.
라고 하였다.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석다산 사람이다. 일찌기 입산하여 수도하고 꿈에 천신을 보고 크게 깨닫다. 3월 16일 마리산으로 달려가 공물하며 경배하고 돌아오고, 10월 3일이면 백두산에 올라가 제천했다. 제천은 곧 신시의 옛 풍속이다.
홍무 23년 수군 130여만이 바다와 산으로 나란히 공격해왔다. 을지문덕은 능히 기이한 계책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서 이를 초적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러 마침내 으를 대파혀였다. 수나라 군사는 무륙 양군이 무너져 살아서 요동성(오늘의 창려성)까지 돌아간 자가 겨우 2700인이었다. 양광은 사신을 보내 화해를 구걸했으나 문덕은 듣지 않고 영양제도 또한 엄명하여 이를 추격케하였다. 문덕은 제장과 더불어 승승장구하여 똑바로 밀어붙여 한쪽은 현도도로부터 태원까지 추격하고 한쪽은 낙랑도로부터 유주에 이르렀다. 그 주군에 쳐들어가 이를 다스리고 그 백성들을 불러다가 이를 안무하였다.
여기에서 건안 건창 백암 창려의 제진은 안시에 속하고 창평 탁성 신창 용도의 제진은 여기에 속하고 고노 평곡 조양 누성 사구을은 상곡에 속하고 화룡 분주 환주 풍성 압록은 임황에 속했다. 무두 옘처럿 관리를 두고 다므렸다. 이에 이르러 강병백만으로 강토는 더욱 더 커졌다.
양광은 임신의 오랑캐라고 한다. 출사가 성대하기로는 예전에는 그 예가 없었다. 그런데 조의 20만인을 가지고 모조리 그 군을 멸망시켰는데 이는 을지문덕 장군 한 사람의 힘이 아니겠는가? 을지공과 같은 분은 곧 만고에 세상의 흐름을 만드는 한 성걸이다. 문충공 조준이 명나라 사신과 더불어 축배하고 함께 백상루에 올라 이렇게 시를 읊었다.
살수는 탕탕하게 흘러 프르고 허하고나,
수나라 병사 백산은 물고기 밥이 되었지.
이제 가던 길 멈춰 어부에게 그 때 얘기 듣나니
정부이 한마디 웃음 남기기엔 오히려 모자라네.
옛 역사에서 말하기를,
‘영양수원호태열제의 홍무 9년 제는 서부대인 연태조를 보내 등주를 토벌하고 총관위충을 잡아 죽이게 하다’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백제는 병럭으로써 제나라 노나라 오나라 월나라 등지를 평정한 후 관서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왕작을 분봉하여 험난한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정벌한 곳의 세금을 고르게 부과하여 모든 것을 내지에 준하게 하였다. 명치연간에 백제의 군정이 쇠퇴하고 진흥치 못하매 권익의 집행이 모두 성조로 돌아왔다. 성읍을 구획짓고 문무의 관리를 두었는데 수나라가 또 군대를 일으켜 말썽이 났다. 남북이 소요하여 사방이 온통 시끄러워지니 해독은 백성들에게 시치게 된지라. 제는 몹시 화를 내어 삼가 하늘의 뜻을 행하여 이들을 토벌하니, 사해에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수나라 왕 양견은 은밀하게 모반의 뜻을 품고 감히 복수의 군대를 내어 몰래 위충 총관을 파견하여 공명을 위해 관가를 부수고 읍락에 불지르고 노략질하게 하였다, 이에 제는 곧장 장병을 보내 적의 괴수를 사로잡아 죽이니,산동지방은 이에 다시 평정되고 해역은 조용해졌다. 이 해에 양견은 또 양량왕세적등 30만을 파견하여 싸우도록 했으나 겨우 정주를 출발하여 아직 요택에도 이르지 못하였을 때 물난리를 만나서 식량은 떨어져 배고픔은 심하고 전염병마저 크게 돌았다. 주라고는 병력을 모아 등주에 웅거하여 전함 수백척을 징집시켜 동래로부터 배를 띄워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는데, 고구려가 이를 알아차리고는 후군으로써 이를 방어하도록 내보냈는데, 갑자기 큰 바람이 일어나서 전군이 물에 떠다니는 판에 백제가 수나라에 청하여 군의 향도가 되려 하다가 고구려의 타이릇을 받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좌장군 고성은 은밀하게 수나라와 친할 마음이 있어 은밀하게 막리지의 북벌계획을 막았다. 이에 여러 차례 청해서 출사하여 공격함으로써 공을 세웠다. 그러나 홀로 막리지는 대중의 의견을 물리치고 남수북벌의 정책에 집착하여 여러차례 이해관계를 들어 말하므로 이 말에 따르게 되었다. 고성이 즉위하게 되자 전황제의 모든 정책은 폐기되었다. 사신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노자의 상을 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도덕경을 청강시켰다. 또 무리 수십만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게 하였으니 부여현으로부터 남해부에 이르는 10 00여리이다. 때에 서부대인 연개소문은 청하여 도교를 강하는 것과 장성쌓는 일을 중지시키고자 했으나 제는 기꺼워하지 않고 소문의 병사를 빼앗고는 장성을 쌓는 일의 감독을 시키더니, 은밀하게 뭇 대인과 더불어 의논하여 연개소문을 주살코자 하였다. 소문은 앞질러 이 말을 들을 수 있어 장탄식하며 말하기를,
'어찌 이몸이 죽고나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랴? 일은 급하다. 때를 잃지 말지라.'
하고 모든 부장을 모아 마치 열병하는 것처럼 하고는 성대하게 술상을 벌려 뭇대신을 초청하여 함께 이를 시찰하자고 하였다. 모두가 참석하자 소문이 소리를 크게 내며 격려하기를,
‘대문에 호랑이 여우가 다가오는데 백성구할 생각은 않고 되려 나를 죽이려 한다. 빨리 이를 제거하라'
하니 제는 변고를 듣고 평복으로 몰래 도망쳐 송양을고 가서 조서를 내려 나라의 대신을 모으려 했으나 한 사람도 오는 사람 없고 보니 스스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저절로 숨이 떨어져 붕어하였다.
<<조대기>>에 가로대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씨. 그의 선조는 봉성 사람으로 아버지는 태조라하고, 할아버지는 자유라하고, 증조부는 광이라 했으니, 나란히 막리지가 되었다. 홍무 14년 5월 10일 태어났다. 나이 9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는데 의표웅위하고 의기호일하여 졸병들과 함께 장작개비를 나란히 베고 잠자며,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시며, 무리속에서 스스로의 힘을 다하였으니, 혼란한 속에서도 작은 것을 다 구별해내고, 상을 베풀때는 반드시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며, 마음을 미루어 뱃속에 참아두는 아량이 있고, 땅을 위로 삼고, 하늘을 경으로 삼는 재량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여 복종해 한 사람도 딴 마음을 갖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법을 쓰는데 있어서는 엄명으로 귀천이 없이 똑같았으니 만약에 법을 어기는 자 있으면 하나같이 용서함이 없었다. 큰 난국을 만난다 해도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었으니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눔에 있어서도 역시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고, 항상 자기 겨레를 히치는 자를 소인이라 하고, 능히 당나라 사람에게 적대하는 자를 영웅이라 하였다. 기쁘고 좋을 땐 낮고 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으나 노하며 권세있는 자나 귀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겁냈다. 참말로 일세의 쾌걸인저!’라고 했다. 스스로 ‘물 가운데 살아서 능히 잠행할 수 있고 온종일 더욱 건장하게 피로할 줄 모른다’고 말해였다. 무리들 모두 놀라 땅에 엎드려 절하며 가로대 ‘창해의 용신이 다시 몸을 나타내심이로다’라고 했다.
소문은 마침내 고성제를 내어 쫓고 무리와 더불어 함께 고장을 맞아들여 이를 보장제로 삼다. 소문 드디어 뜻을 얻어 만법을 행하니, 대중을 위한 길은 정기 자유 개물 평등으로 하고, 삼홀을 전으로 하고,조의에 율이 있게 하고,힘을 국방에 쏟아 당나라에 대비함이 매우 완전하였다. 먼저 백제의 상좌평과 함께 의를 세웠다. 또 신라의 사신 김춘추에게 청하여 자기의 집에 머무리도록 하며 말하기를,
‘당나라 사람들은 패역하기를 짐승에 가깝습니다. 청컨대 우리나 그대들은 반드시 사사로운 원수를 잊고 지금부터 삼국은 백성들의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 곧바로 당나라 서울 장안을 쳐든어가 도륙한다면 당나라 괴수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전승의 뒤에 옛 영토에 따라서 연정을 실시하고 인의로써 함께 다스려 약속하여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영구준수의 계획으로 함이 어떻겠소?’
라고 하며 이를 재삼 권하였으나, 춘추는 종래 듣지 않았으니 애처롭고 가석할 일이었다.
개화 4년 당나라 이세민이 군신에게 말하기를,
‘요동은 본래 제하의 땅이다. 수나라가 네번 출사하였어도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이제 출병하여 제하를 위해 자제의 원수를 갚고자 한다.'
고 하다. 세민은 친히 활과 화살을 차고 이세적 정명진 동 수십만 명을 이끌고 요택에 이르다 진흙길 200여리 사람과 말이 다닐 수 없었다. 도위 마문거가 말에 채찍질하며 달려가 공격했지만 이미 싸움을 벌였던 행군총관 장군차는 대패했다. 이도종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였고 세민은 몸소 수백기를 이끌고 세적과 합쳐 백암성의 서남쪽을 공격했다. 성주인 손대음은 속여서 항복을 청하게 하고 실은 틈을 엿보아 반격하고자 하였다. 세민은 안시성에 이르러 먼저 당산으로부터 병사들을 진격시켜 이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북부의 욕살 고연수와 남부의 욕살 고혜진은 관병 및 말갈병 15만 이끌고 똑바로 전진하여 안시에 연결되는 진지를 쌓고,높은 산의 험악한 곳에 의거하여 진지를 쌓고 성의 곡식을 식량으로 삼고, 병력을 종휭무진으로 풀어 놓아 당나라군마를 약탈했다. 당나라군을 감히 접근하지도 못하고 돌아가려고 해도 지흙길이 가로 막았으니 가만히 앉아서 패하는 길밖에 없었다. 고연수는 군대를 이끌고 똑바로 나아가서 안시성에서 약 40리 떨어진 곳에 나아가더니, 사람을 보내 대로 고정의에게 물었으니 그는 나이가 많아서 모든 일에 익숙했다. 정의노인은 대답하기를,
'이세민은 안으로 군웅들을 제거하고 집을 바꿔 나라를 이루었으니 역시 범상하진 않다. 지금 모든 당나라의 병력이 떨치어 나왔으니 업신여길 수가 없다. 우리들로서 바람직한 것은 군대를 움직이지 말고싸우지 않으며,여러날을 두고 지구전을 펴며,날랜 병사들을 보내 그 식량 보급의 길을 끊는 것보다 좋은 계책은 없다. 식량이 이미 끊겨 싸우고자 하나 싸워주지도 않고, 돌아가려해도 길이 없으니 결국 이기기 마련이라‘
고 하였다. 고연수는 그 계략에 좇아 적이 오면 막고, 적이 도망가면 곧 추격을 멈추고, 또 날랜 병사들을 파견하여 식량의 길을 끊고, 불태우거나 빼앗게 하자 이세민은 백가지 계략으로 유혹하여 뇌물도 썼으나 겉으로는 따르는 체하고는 속으로는 거슬렸다. 수시로 습격을 감행하여 마구 무너뜨리니 적군의 사상자는 쌓여만 갔다. 고연수등은 말갈과 병력을 합쳐 진지를 펴고 지구전을 벌이다가 어느날 저녁 표변하여 작전을 개시하여 급히 습격하여 번개처럼 치니, 이세민은 거의 포위될 뼌하게 되자 비로소 두려운 빛을 보였다. 이세민은 또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재물과 보화를 보내면서 연수에게 말하기를,
‘나는 귀국의 힘있는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였으므로 그 죄를 물으려온 것이다. 그대의 나라에 들어와서 싸움을 하게 됨에 말 먹이와 식량을 공급할 수가 없어서 얼마간 노략질을 몇 곳에서 했었을 뿐이니, 그대의 나라가 예를 갖추어 수교를 기다리면 반드시 회복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연수는 말했다.
'좋다, 그대의 군사가 30리를 후퇴하면 곧 나는 우리 황제를 알현코자한다. 그렇지만 막리지는 국가의 기둥이다. 군법을 스스로 갖고 있으니 많은 말도 팔요가 없다. 그대의 임금 세민은 아비를 폐하고 형을 죽이고 동생의 아내를 음란하게도 받아들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죄를 물을 만하다. 으 뜻을 이세민에게 전하여라.'
이에 사방으로 감시관을 보내 더욱 더 방비를 굳혔다. 산에 의지하여 전지를 굳히고 허를 틈타 기습하니, 세민은 백가지 계략을 다 써도 어쩔수가 없어 요동 출병의 불리를 통한히 여길 뿐 후회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유공권의 소설에서,
‘육군은 고구려의 조롱거리가 되고 거의 떨쳐 일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척후병이 영공의 군기는 흑색 깃발(고구려의 군기 색갈)로 에워 싸였다고 보고 하니 세민은 크게 놀랐다. 종내 저 혼자 탈출했다해도 위험을 이와 같있다.'
라고 하였으니, <<신구당서>>와 사마공의 <<통감>>이 이를 적지 않음은 어찌 나라를 위해 치욕스러운 일을 숨기려 함에서가 아닐까보냐? 이세적은 세민에게 말한다.
'건안은 남쪽에 있고 안시는 북에 있습니다. 우리 군대의 양곡은 벌써 요동으로 수송할 길을 잃었습니다. 지금 안시성을 넘어 건안을 습격하는데 만일 고구려가 수송로를 끊으면 군세는 궁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안시를 공격함만 같지 않을 안시가 함락되면 곧 북치고 행진하여 건안을 취할 뿐입니다.'
안시성의 사람들은 세민의 깃발이 덮어오는 것을 멀리 바라보며 성위에 올라 ㅜ치고 떠들며 침을 뱉으며 세민을 조롱했다. 그의 죄목을 열거하면서 무리에게 떠들어 댔다. 세민은 몹시 화를 내면서 성을 함락시키는 날 성중의 남여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흙구덩이에 생매장하겠다고 했다. 안시성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더 굳게 성을 지키니 성을 공격해도 함락되지 않았다. 때에 장량은 사비성에 있었는데 그를 불러오게 하였으나 채 이르지 못하였고. 이리저리 망설이는 사이 기회를 잃고 말았다. 이도종도 역시 험악한 곳에 떨어져 떨치지 못하니 당군의 여러장수들은 의논한 끝에 갈라졌다. 세적만이 홀로 생각하기를 '천자의 친정은 제장의 정벌과는 달라 요행을 바라고 행동한다는 건 안될 일이다. 지금 건인 신성의 적은 무리가 수십만이요. 고연수가 이끄는 말갈의 군대도 역시 수십만이다. 국내성의 병력도 오골성을 돌아 낙랑의 여려길을 차단할 것 같다. 그리 된다면 저들의 세력은 날로 성해지고 포위당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적을 우롱하다가는 후회막급이 될 것이니,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고 다음에 건안을 취하고 그런 후에 천천히 진격하느니만 못하다. 이것이 만전책이다.'라고 했다. 이 문제가 채 결론도 나기전에 안시성주 양만춘은 이를 듣고 밤 깊음을 틈타 수백의 정예를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내려오니 적진은 스스로 서로 밟고 찔러 살상된 자가 수없이 많았다. 세민은 이도종을 시켜 흙산을 성의 동남쪽에 쌓게 하였다. 관병(고구려 병사)은 성의 틈 사이로 출격하여 마침내 토산을 뺏고 참호를 파고 이를 지키니 군세는 더욱더 떨치더라. 당군의 여러 진은 거의 싸울 힘을 잃으니, 부복애는 패전으로 목잘려 죽고 도종이하 모두가 맨발로 나와 죄를 청하였다. 막리지는 수백기를 이끌고 난파를 순시하며 상세하게 정세를 듣더니 사람을 보내 총공격하여 사방을 칠 것을 명하였다. 연수등도 말갈병과 합쳐 협공하고 양만춘은 성위에 올라가 싸움을 격려하니 사기는 더욱 떨쳐저서 일당백의 용맹이 없는 자가 없었다. 세민은 이기지 못함을 분하게 여겨서 감연히 나서서 싸우려 했다. 양만춘은 이에 한마드 소리지르며 화살을 당겨 반공에 날렸다. 세민은 진에서 나섰다가 왼쪽 눈에 화살을 맞아 떨어져버렸다. 세민은 어쩔 줄을 모르고 군사들 틈에 끼어서 도망쳤다. 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볍 기병 수만을 이끌고 후군이 되도록 하였으나 요택의 진흙길은 군마의 행군을 어렵게 했다. 무기에게 명하여 모든 병사들에게 풀을 베게하여 길에 깔고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니. 세민도 몸소 장작을 말고삐에 연결하여 매고 역사를 도왔다.
겨울 10월 포오거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길이 메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모든 군사가 발착수를 건너는데 심한 바람과 눈이 몰아쳐서 사졸들을 적시니 죽는 자가 많이 많이 나왔다. 이에 불을 길에 지피고 기다렸다. 때에 막리지 연개소문은 승승장구 이들을 심히 급하게 이들을 추격했다. 추정국은 적봉에서부터 하간현으로 이르고, 양만춘은 곧바로 신성으로 나아가니, 군세는 크게 떨쳐졌다. 당나라 군사는 갑옷과 병기를 마구 버리면서 도망가, 드디어 역수를 건넜다. 때의 막리지는 연수에게 명하여 용도성을 개축케 하니 지금의 고려진이다. 또 제군을 나누어서 일군을 요동성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창려이다. 일군을 세만의 뒤를 바짝 쫓게 하고 또 일군을 상곡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대동부이다. 이에 세민은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침내 사람을 보내 항복을 구걸케 되니 막리지는 정국 만춘 등의 수만 기를 이끌고 성대하게 의용을 갖추어 진열한 뒤 선도하게 하여 장안에 입성하여 세민과 약속하였으니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가 모조리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와 더불어 백제와 경쟁하는 사이가 되어 함께 요서의 땅에 있게 되었으니, 백제가 영유하던 곳은 요서의 진평이라 했다.
강남에는 월주가 있었다. 그 속현은 산음 산월 좌월이있었다. 문자제의 명치 1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군현을 고쳐 송강 회계 오월 좌월 산월 천주라 했다 12년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를 삼았다. 이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의 진평 등의 군을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
고려진은 북경의 안정문 밖 60리 되는 곳에 있고 안시성은 개평부의 동북 70리 되는 곳에 있다. 지긋의 탕지보이다. 고려성은 하간현의 서북 12리에 있다. 모두 태조무열제가 쌓은 것이다. 당의 번한은 고려성 회고의 시 한술르 세상에 전하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외진 땅 성문은 열렸는데
구름 끝 성벽은 길기도 해라.
물 맑은 곳에 저녁빛 비치더니
강변이 어둡자 촛불 별빛 반짝이네
북소리 맞춰 구름이 보이니
새 꽃이 흙 털며 새단장하고
언제나처럼 아침의 거리는 밝아오건만
다시 들을 길 없는 관현의 소리여
가시밭 누런 먼지 속
옛 길 옆에는 잡초만 무성하네
먼지 따위에 묻힌 비춰여
황량한 언덕엔 소와 양만 오르지
어쩔거나 옛날의 일을
가을 소리 고요하니 기러기만 나르네
내 비록 운율은 따를 바 없지만 뒤를 이어 보련다.
요서엔 아직도 옛 성터가 있다네
생각컨대 큰 나라에 왕조는 길었으리
연나라 험한 산 싸움도 많고
요하는 도도히 하늘 빛으로 흘러라
바람숲은 빈 골짜기에 흔들리는데
학은 높은 가지에 울어 단장하네
군기와 장수는 하룻밤에 변해도
장사꾼 방울소리 요란키도 해라
연도 양도 본디는 우리 땅이었나니
고구려 군사 진치고 말먹이던 곳이었지
영웅은 나지 않고 세상은 흘러가니
다시는 양떼처럼 적을 몰지 못하고
이제와서 끝없이 옛 일을 슬퍼하며
핵랑의 만리붕정에 이별노래 부르네.
연타발은 졸본 사람이다. 남북의 갈사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를 이루어 거만금에 이르렀다. 은밀하게 주몽을 도와 창업입도의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를 하게 되더니 고주몽성제가 북옥저를 칠 때에 양곡 5,000석을 바쳤다. 서울을 눌현으로 옮길 때는 앞질러 자납을 원하여 유망민을 초무하고 왕사를 권하여 공을 세웠으니 좌원에 봉작을 받았다. 나이 80에 죽으니 바로 다물 34년 병인 3월이다.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찌기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가 오거든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했다. 소서노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기묘년 3월에 패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 번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 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부를 쌓아 몇 만금이러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북쪽은 대수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천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제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는 몹시 기뻐하시며 이를 장려하여 소서노를 어하라라고 책봉했다. 13년 임인에 주몽제가 돌아가셨다.
태자 비류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마여등은 온조에게 말하기를 ‘신등이 듣기는 마한의 쇠퇴는 이미 들어난 일이요 가서 도읍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라고 했다. 온조가 ‘좋다’고 승락하니 곧 배를 짜서 바다를 건너 처음 마한의 미추골에 이르렀다. 앞으로 나아가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텅 비어서 사람 사는 곳이 없었다. 한참 만에 한산에 이르러서 부아악에 올라 살만한 땅을 살펴보고는 마여 오간등 열명의 신하들이 말했다.
‘생각컨대 이 하남의 땅은 북쪽이 한수를 끼고 동쪽은 크고 높은 산이요 남쪽은 기름진 평야가 열려 있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으니 이곳은 천험의 지리를 갖추고 있어 얻기 어려운 지세이옵니다. 마땅히 도읍을 정할 만한 곳입니다. 여기보다 나은 곳을 찾지 마시옵소서.’
온조는 열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하남의 위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라고 칭하니 백제라는 이름은 백사람이 건너 왔다는 뜻의 이름이다. 뒤에 비류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그의 땅을 가지고 귀순해 왔다.
사로의 시왕은 선도산의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제실의 딸 파소가 있었는데 남편없이 아이를 배었으므로 사람들의 의심을 받아 눈수로부터 도망쳐 동옥저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의 나을촌에 와 닿았다. 때에 소벌도리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가서 집에 데려다 거두어 길렀다. 나이 13세에 이르자 지혜는 빼어나고 숙성하고 성덕이 있는지라, 진한 6부의 사람들이 존경하여 거세간이 되니 도읍을 서라벌에 세우고 나라를 진한으로 하고, 또한 사로라고도 하였다.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였다. 북은 바다로 막히고 치소가 있었는데 국미성이라 한다. 동서에 각각 마을이 있다. 어떤자는 조공하고 어떤자는 반한다. 뒤에 대마의 두 섬은 마침내 임나가 통제하는 바가 되었다. 때문에 임나는 이 때부터 대마도를 다 뜻하는 말이 되었다. 옛부터 구주와 대마도는 곧 삼한이 나누었던 땅으로 본래 왜인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 임나는 또 갈려서 삼가라가 되었다. 소위 가라는 가장 중심이 되는 읍의 이름이다. 이 때부터 삼한은 서로 다투고 싸워왔고 세월이 오래 되도록 적대감을 풀지 못하였다. 좌호가라는 신라에 속하고, 계지가라는 백제에 속함은 바로 그것을 말한다. 영락 10년 3가라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은 모두 임나에 통제되었으니, 열나라가 나누어 통치하면서 연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속하여 열제의 명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는 못했다.
아유타는 삼국유사에서 서역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지금 옛날 여러 기록을 고찰해 보면 곧 아유타는 지금의 섬라를 말함인듯 하다. 그렇다면 아유타의 사람들은 대식사람들 때문에 쫓기어 이곳에 이르러 살았던 것인지?
이명의 <<유기>>는 말한다. ‘옛날 백제의 장사꾼이 있었는데 바다를 건너 아유타에 가서 많은 재보를 벌어 돌아왔다. 그 곳 사람들도 백제 사람들을 따라와 내왕했던바, 날로 교제하여 친밀해졌다. 그렇지만 그 풍속은 겁이 많고 싸움엔 익숙지 않아 많은 사람에게 통제되고 제약을 받게 되었다.’
※주: 태백일사 저자의 생각에 아유타는 인도의 아요다이가 아니라 버마의 아유타였을 것이라'하는 내용이다. 지리적으로 인도보다 가까우므로 그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으나 파사석탑이 인도 아요다이의 특산인 돌인 것이 판명되고 태양문장등 많은 수로왕의 유적과 북인도 옛 아유타국의 유적에 유사점이 입증되어 저자의 생각이 틀린 것으로 증명되었다.
또 말하기를,
‘평양에 을밀대가 있는 바, 세상에선 말하기를 을밀선인이 세운 것이라 한다. 을밀은 안장제 때 뽑히어 조의가 되고 나라에 공이 있었는데 본래 을소의 후손이다. 집에서 책을 읽고 활쏘기를 배우며 삼신을 노래하고 무리를 모아 수련하니, 그 옳음과 용기에 공으로 봉해졌다. 일세의 조의로서 그의 무리는 3,000이었으니 가는 곳마다 구름처럼 모여서 다물흥방의 노래를 제창했다. 이에 의하여 그 몸을 던져서 의를 다한다는 풍속을 고취한 사람이었다.’고 하였으니. 그 노래에서 말한다.
지나간 것은 법이 되고
뒤에 오는 것은 위가 되네
법이라는 것은 그래서 날 것도 사라질 것도 없으며
위라는 것은 그래서 귀할 것도 천할 것도 없지
사람 가운데 하늘도 땅도 하나일 뿐이고
마음은 신과 더불어 근본에 닿나니
하나이기 때문에 빈 것도 찬 것도 같은 것이며
근본에 닿기 때문에 신이라 함이나 사물이라 함이 둘이 아닐 뿐
참은 온갖 착함의 극치이고
신은 참나를 주관한다네
극치이기 때문에 세가지 참은 하나로 돌아오고
참하나이기 때문에 일신은 곧 셋이라
하늘 위 하늘 아래 다만 내가 스스로 있음이여
다물은 나라를 일으킴이라
스스로 있기 때문에 티 없이 일을 하고
나라를 일으켰기 때문에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였지
참천명의 큼이여, 성품을 낳아 공명에 통하네
집에서는 효도하고 나서면 충성함이라
광명은 그래서 모든 선을 행하지 않음이 없고
효와 충은 그래서 모든 악은 일체 짓지 않나니
백성의 옳은 바는 나라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니
나라없이 나라는 건 어떻게 생겼을 것인가
나라가 소중하기 때문에 백성은 사물이 있어 복을 누리고
내가 있기 때문에 나라엔 혼이 있어 덕을 누린다네
혼의 생을 낳고 각을 낳고 영을 낳음이여
일신의 그윽한 거처는 천궁이 되네
삼혼은 그래서 지혜와 지혜와 생을 함께 닦을 수 있고
일신은 그래서 모습과 혼을 함께 이루는 것이라
우리들 자손 착하게 나라를 이룸이여
태백의 가르침은 우리의 스승일세
우리들 자손들은 그래서 그래서 다 평등하고
우리들의 스승은 그래서 가르침마다 새로워라
을밀선인은 일찌기 대에 살면서 하늘에 제사올리고 수련함을 임무로 삼았다. 대개 선인의 수련법은 참전으로 계를 삼아 스스로를 굳세게 하고 영광되게 한다. 나를 비워 사물이 있게하고 몸을 버려 옳음을 지켜서 나라 사람들의 사표가 됨이니,천추에 우러러 감흥을 일으킬 만한 것이다. 역시 사람들의 존경하는 상징이 되었으니, 후세 사람들은 그 대를 칭하여 을밀이라 했으며, 바로 금수강산의 빼어난 곳의 하나이다.
- 고구려국 본기 끝 -
대진국 본기 제7
大震國 本紀 第七
<<조대기>>에서 말한다. 개화 27년 9월 21일 평양성 함락 때 진국장군 대중상은 서압록하를 지키다가 변을 듣고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험한길을 달려 개원을 지나는데, 소문을 듣고 따르겠다고 원하는 자 8000인이 재빨리 모여들어, 동쪽으로 동모산에 이르러 웅거했다. 성벽을 굳게하여 스스로 보존하고 나라를 후고구려라 칭하고 기원을 중광이라 하였다. 이르는 곳마다 격문을 전하니 원근의 뭇 성들은 귀속해 오는 곳이 많았다. 다만 옛 땅을 회복함을 자기의 임무로 삼다가 중꽝 32년 5월 대중상은 붕어하였다. 묘호를 세조라 하고 시호를 진숙열황제라 하다.
태자 조영은 부사를 따라 영주 계성으로부터 무리를 이끌고 당도하여 제위에 오르다. 홀한성을 쌓아 도읍을 옮기고 군 10만을 모집하여 위세를 크게 떨치었다. 곧 계책을 세우고 제도를 세워 당나라에 대항하여 적에 복수할것을 스스로 맹세했다.
말갈의 장수 걸사비우와 거란의 장수 이진영과 손을 잡고 병력을 연합하여 크게 당나라 장군 이해고를 천문령에서 격파했다. 뭇 장수들을 나누어 군현을 두고 지키며 유망민을 초무하고 정착을 널리 보호하고 크게 백성의 신망을 얻어 모든 기강을 새롭게 했다. 국호를 정하여 대진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이라 하고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니,땅은 6,00리가 개척 되었다. 천통 21년 봄 대안전에서 돌아가시니 묘호를 태조리하고 시호를 성무고황제라 하다. 태자 무예가 즉위하다. 개원하여 인안이라 하고 서쪽으로 거란과 경계를 정하니 오주목의 동쪽 십리에서 황수를 굽어 본다. 이해 개마 구다 흑수의 여러 나라가 모두 신하 될 것을 청하며 공물을 바쳤다. 또 대장 장문휴를 보내 자사 위준을 죽이고, 등주와 동래를 취하여 성읍으로 삼다. 당나라 왕 융기가 노하여 병사를 보냈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듬해 수비장수 연충린이 말갈병과 함께 요서의 대산의 남쪽에서 크게 당나라 군사를 격파하였다. 당나라는 비밀히 신라와 약속하여 동남의 여러 군과 읍을 급습하여 천정군에 이르다. 제는 조서를 내려 보병과 기병 2만을 보내 이를 격파 케하다. 이 때 신라와 당의 군사는 동사자가 아주 많았다. 이에 추격하여 하서의 이하에 이르러 국계를 정하니, 지금 강릉의 북이하가 그것이다. 해주 암연현은 동쪽으로 신라와 접했는데 암연은 지금의 옹진이다. 이로부터 신라는 해마다 입공하고 임진강 이북의 제성은 모조리 우리에게 속했다. 다시 이듬해 당나라는 신라의 병사와 연합하여 침입하였으나 결국은 아무 공도 없이 물러났다.
※주: 임승국님의 주해에 따르면 <요사 권 38 지리지>에 ‘암연현은 동쪽으로 신라와 경계하고 옛 평양성은 암연현의 서남쪽에 있으며 동북으로 120리 지점에 해주가 있다.’
평양 ----- 암연현------------------- 해주
신라
만약 옹진을 암연이라 한다면 평양은 어디 있어야 하고 해주가 어디 있어야 하느냐?'라고 하며 이는 한반도의 지명일 수 없다'고 하였다.
요사의 해주는- 단군세기나 북부여기 가섭원부여기에 나오는 해두가 아닐까? 또는 오늘날 연해주라는 지명의 어원이 된 것은 아닐지?
인안 16년 구다 개마 흑수의 여러 나라들이 항복해 오니, 이들을 성읍으로 삼았다. 이듬해 송막 12성을 쌓고 또 요서 6성을 쌓다. 마침내 5경 60주 1군 38현을 소유하니 그 원폭이 9,000리였다. 성대한 나라였다. 이 해 당나라 신라 및 왜도 나란히 사신을 보내 조고을 바치니 천하는 해동성국이라고 칭송했다. 이에 발해사람 셋이면 한마리 호랑이를 당한다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때의 군민은 화락하고 역사를 논하며 의를 즐겼다. 오곡은 풍성하고 사해는 안락했다. 대진육덕의 노래라는 것이 있어 이러한 대진국을 찬미했다. 다음해 3월 안민현에 감로가 내리다. 예관은 계장을 올려 하의할 것을 청하여 이에 따랐다. 이달 16일 삼신일체의 상제를 서압록하의 강변에서 제사하다. 서압록하는 고리의 옛 나라의 땅이다. 19년 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를 광종이라 하고 시호는 무황제라 했다. 태자 흠무가 즉위했다. 개원하여 대흥이라 하고 도읍을 동경의 용원부로부터 상경의 용천부로 옮기다. 이듬해엔 태학을 세우고 천경신고를 가르치며 한단고사를 강하고, 또 문사에 명하여 국사 25권을 편찬케 하니, 문치는 예악을 일으키고 인간의 홍익하는 교화는 이로써 만방에 미치게 되었다.
※주: 1949년 길림성 돈화현 현성 근처의 우정산 고분에서 문황제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의 묘비가 출토 되었다. 그 비문 2행은 ‘대흥’으로 시작된다. 대흥을 연호로 적는 유일한 기록이 태백일사.
대흥 45년 치정의 절도사 이정기는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 군대에 항거하니 제는 장수를 보내 싸움을 도웁게 하더라. 이정기는 고구려 사람이요, 평로에서 태어났다. 22(?),년 장수들은 군사 이희일을 쫓고 정기를 즉위시켰으나 죽었고, 아들인 납이 아버지의 백성들을 통솔하였다. 56년 납도 죽고 아들 사고가 그 자리를 이었다. 사고가 죽었을 때 가인들은 상을 발하지 않고 은밀히 사람을 보내 사도를 맞아 고를 모셨다.
대흥 57년 황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를 세종 시호를 광성문황제라하다. 국인은 그의 족제 원의를 즉위시켰으나 성품이 포악하여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다. 갑술년 국인은 이를 폐하고 선제의 손자 화흥을 맞아 즉위시키고 개원하여 중흥이라 하였다. 이듬해에 붕어하시니 묘호를 인종 시호를 성황제라 하였다. 황숙인 승린이 즉위하니 이를 목종 강황제라 한다. 의종 정황제 원유, 강종 희황제 언희, 철종 간황제 명충을 지나 선황제 인수에 이르다. 타고난 모습이 영명하시고 덕은 신과 같고 재능은 문무를 겸비하였으니 곧 태조의 풍채가 있었다. 남쪽으론 신라를 평정하여 이물 철원 사불 암연 등의 7주를 두고북은 염해 나산 갈사 조나 석혁 및 남북 우루를 공략하여 제부를 두고, 장백의 동쪽을 안변이라 하고 압록강의 남쪽을 안원이라 하고 모란의 동쪽을 철리라 하고 흑수의 강변을 회원 난하의 동쪽을 장령, 장령의 동쪽을 동평이라 하며 우루는 북쪽에 있다. 대개마의 남북에 자리잡고 땅의 넓이 9,000리 영토는 크게 열리고 문치는 널리 가득 퍼졌다. 위론 국도로부터 밑으론 주현에 이르기 까지 모두 학식 있고 구서 오계를 아침저녁으로 읽고 익혔다. 춘추에 공적을 생각하여 뭇사람이 의논하여 인재를 추천하며 공물을 바쳤다. 사람들은 이미 힘을 길렀고 집집마다 모조리 나라에 쓰임을 기다리니, 이로부터 국세는 부강하어 나라의 안팎이 모두 편안하게 즐거웠으니 절로 도둑질이나 모사의 폐단이 없어졌다. 당나라,왜,신라,거란 할것 없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천하만방은 이로써 성인흥취의 해동성국이라고 흠송하였다.
오대가 바뀌었을 때 야율은 빈번하게 몇차례나 싸움을 일으켜 왔으나 종내 굴복 시키지는 못했고 뒤에 장종 화황제 이진, 순종 안황제 건황, 명종 경황제 현석을 지나 애제인 청태에 이르러 거란에게 멸망되니 세조로부터 15세를 전하여 259년을 누렸다.
목종은 개원하여 정력이라 했고 의종은 영덕 강종은 주작 철종은 태시 성종은 건흥이라 히고, 장종은 함화 순종은 대정 명종은 천복 애제는 청태라고 개원하였다.
대진국의 남경인 남해부는 본래 남옥저의 옛 땅이다. 지금의 해성현이 그것이다. 서경인 압록부는 본래 고리국이요, 지금의 임황이다. 지금의 서요하는 곧 옛날의 서압록하였다. 고로 옛 책에서의 안민현은 동쪽에 있으며, 그 서는 임황현이다. 임황은 뒤에 요나라의 상경 임황부가 된다. 곧 옛날의 서안평이다.
정주는 의려국이 도읍한 땅이다. 선비 모용괴에게 패하여 핍박 받을 것을 걱정하다가 재빨리 생각하기를 ‘나의 혼이 아직도 오히려 망하지 않았오니 어디간들 이루지 못 할 것인가?’라고 했다. 은밀하게 아들 부(의)라에게 맡겨서 백랑산을 넘어 밤에 해구를 건너게 하였더니 따르는 자 수천이라, 마침내 바다를 건너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자칭 삼신의 부명에 응한다고 하여 군신으로 하여금 하례의 의식을 올리게 하였다.
혹은 말한다. ‘의려왕은 선비 때문에 패하여 도망쳐서 바다에 든 후 돌아오지 않았다. 자제들은 도망쳐서 북옥저를 보젼하고 이듬해 아들 의라가 즉위하니 이 때부터 모용괴가 또다시 국인을 침략하였다. 이에 의라는 무리 수천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마침내 왜인을 평정해서 왕이 되다.’라고.
일본은 옛날에 이국에 있었나니 역시 이세라고도 한다. 왜와 이웃하였다. 이도국은 축자에 있으며 곧 일향국이다. 여기서부터 동쪽은 왜에 속하며 그 남쪽은 안라에 속한다. 안라는 본래 홀본 사람이다.
북쪽에 아소산이 있다. 안라는 뒤에 임나에 들어갔는데 고구려와 이미 친교를 맺었다. 말로국의 남쪽을 대우국이라 한다. 시라군이 있었으니 본래 남옥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남만 도침미 완하 비자체의 무리는 모두 조공했다. 남만은 구려의 유종으로서 산월로부터 온 자들이다. 비자체는 변진의 비사벌 사람의 취락이다. 완하는 고구려 속노들이다. 때에 왜인들은 갈리어서 산도에 근거하여 살며 각각 100여국이 있었다. 그가운데 구야한국이 가장 크니 본래 구야본국 사람이 다스렸던 곳이다. 해상 선박은 모두가 종도에 모여 교역했으니 오 위 만 월의 무리들 모두 통상했다. 처음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대마국에 이르는데 사방이 400여리쯤 된다. 또 다시 바다를 건너 천여리쯤 가면 일기국에 이르는데 여기는 사방 300여리쯤이다. 본래 사이기국이라 했다. 여러 작은 섬들이 모두 조공했다.또 바다를 건너면 말로국에 이른다. 본래 읍루 사람아 모이는 곳이다. 동남쪽 육지로 500리 쯤 가면 이도국에 이른다. 곧 반여언의 옛읍이다.
<<신당서>>에서는,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붙어 있던 자로 성은 대씨이다. 걸걸중상이라는 자가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의 여중과 함께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수를 건너 태백산의 동북을 확보하여 오루하에 근거 하였다. 중상이 죽고 아들 조영은 나머지 무리를 이끌고 도망쳐 갔다. 곧 비우의 무리를 합쳐 거칠고 멀다는 것을 믿고 곧 건국하여 스스로 진국왕이라 이름하고 부여 옥저 변한 해북의 해북의 뭇 나라를 모조리 었었다.’고 하였다.
사씨는 말하기를 ‘걸걸중상은 패망의 나머지 무리를 데리고 험한 곳에 달려가 스스로 보젼하였다.’라고 한다. 태왕이 빈을 떠난 것과 같이 고왕 조영은 창업의 뜻을 갖고 가시밭을 갈아 다시 나라의 기초를 이룸은 구천이 월나라를 세움과 같다. 대저 폭원은 이미 설만하니, 곧 문덕을 가지고 이를 닦고 제도를 제정하여 관작을 세우고 군현을 늘어 놓아 대국에 저항하였다. 나라의 영역은 5,000리에 이르고 역사는 300년에 이르다. 당시 사방에 대진국을 넘볼 자가 없었고 역시 크게 성했던 나라라 할만하다.
고려 현종 원문대왕의 20년 거란의 동경장군 대연림은 태조 고황제의 7세손이다. 유수부마 소효원과 남양공주를 사로잡고, 호부사 한소윤 등을 죽이고 즉위하여 요를 세운다고 하고 천경이라고 개원했다. 고길덕을 파견하여 와서 건국을 알리고 겸하여 원조를 청했다.
요동의 유보 수보는 정치를 함에 혹독하였다. 고려의 예종 문효대왕의 11년 정월, 동경의 비장이요, 발해 사람인 고영창은 수십인과 술김에 용기를 내어 칼을 들고 울타리 담장흘 넘어 부위에 들어갔다. 등청해서 유수가 있는 곳을 묻고 거짓으로 외부의 군대가 쳐들어 왔다고 하며 대비를 해야 겠다고 청하였다. 수보는 먼져 나오다가 무리에게 죽임을 당하고, 가유수 대공정과 부유수 고정신은 싸웠으나 이길 수 없자 서쪽 문을 뚫고 나와서 요나라로 도망했다. 영창은 스스로 대 발해국 황제라 칭하고 융기라고 개원하니 요동 50여 주를 거느렸다.
<<송사>>에 가로대, 정안국은 본래 마한의 종자들인데 요나라에 망하니 그 족장은 남은 무리를 규합하여 그 서쪽 변두리 땅을 확보하여 나라를 세우고 개원하여 스스로 장안국이라 했다.
개보 3년, 왕 열만화는 입공하는 여진에게 부탁하여 표문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태종 때 그 왕 오현명은 다시 여진에게 부탁하여 표문을 올리고 공물을 바쳤다. 거기서 요약하여 말하기를 ‘신은 본래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는 터로 발해의 유민으로서 이 한쪽 구석을 보전하는바’라고 하였다. 태종은 답장에서 요약하여 이르기를 ‘경은 마한의 땅을 남김없이 모두 남김없이 보전하고 경파의 표를 올리니 운운’이라고 했다. 단공(988-989)으로부터 순화(990-994) 사이에 다시 여진을 통해 표를 올리더니 그 뒤에는 소식이 없다고 하였다.
대진국은 애제의 청태 26년 봄 정월 야율배는 동생 요골과 선봉이 되어 밤에 홀한성을 포위하자 애제가 성밖에 나가 항복함으로써 대진국은 망했다.
2월 병오 요의 태조가 동단국을 세우고 장자 배를 인왕황으로 삼다. 왕은 감로라고 개원하고 홀한성을 천복성이라 개칭하였다. 천자의 관복을 준용하고 12류의 면류관을 쓰고 모두 용의 형상을 그렸으니 바로 대진국의 옛날 제도이다. 숙부 질자를 좌대상으로 삼고 대진의 노상(이름은 확실치 않음)을 우대상으로 삼으며, 대진국의 사도 대소현을 좌차상으로 삼고, 야율우지를 우차상으로 삼다. 나라 안의 사형이하 죄인을 사면하고 해마다 포 10만단, 말 천필을 할 것을 약속케 했다.
감로 27년 겨울 경진에 요는 동경 중대성을 쳐서 동단국도 없앴다.
- 대진국 본기 끝 -
고려국 본기 제 8
高麗國本紀弟八
태조 신성대왕의 천수 2년 서울을 송악의 남쪽으로 정하다. 25년 어제훈요를 발표했다. 그 대략을 보면 이렇다.
‘생각컨대 우리 동방이 옛부터 당풍을 사모하여 문물 예악이 빠짐없이 당나라의 제도를 따랐다. 방을 달리하고 땅을 달리하는 사람은 성품 또한 각각 다르기 마련이고 적어도 반드시 같을 순 없는 것 아닐까?’
태봉국의 왕 궁예는 그 선조가 평양사람이라 본래 보덕왕 안승의 먼 후예이다. 그의 아비는 강직하여 술가의 말에 따라 어머니의 성씨를 따서 궁씨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의 수임성 사암 모잠 대형은 남은 백성들을 모아 후고구려왕으로 삼고 원조를 신라에 청하였다. 신라왕은 이를 나라의 서쪽 금마저에 두었다가 뒤에 개명하여 보덕왕이라 했다. 신문왕은 즉위하더니 보덕왕을 거두어 소판을 삼고 그의 족자 대문을 금마저에 살게하였는데 모반하여 왕을 칭했기 때문에 주살되었다. 나머지 무리들은 관리를 죽이고 보덕성에 근거하다가 다시 반역을 꾀하였으므로 신아의 평정을 받게 되었고 그곳 사람들은 남쪽의 주와 군으로 옮겼다.
대진국 명종 경황제의 천복 9년 5월 5일, 궁예가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 옥상에는 흰빛이 비추이고 긴 무지개의 끝은 하늘에 다은듯 보였다. 신라 일관이 이를 보고 머지 않아 나라에 이롭지 못한일이 있을 것이라 했다. 이 소식이 들리자 왕은 이를 미워하여 사람을 시켜 그 집을 파괴하고 그를 죽이려 했다. 그 어미는 진귀한 보물로 뇌물을 쓴 후에 애를 끌어안고 도망가 숨어 살며 고생하며 양육했다. 나이 10세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선종이라 했다. 장년이 되자 방일하여 원래부터 계율에 따르지 않으머 크고 작은 일에 담이 컸다. 어느 때 바루를 들고 재를 모시러 가는데 까치가 부적 하나를 물어서 바루 속에 떨어뜨렸다. 이 를 펴본즉 왕이라는 글자가 있는지라, 이를 숨기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매우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앞서 안승 때부터 왕을 모시는데 고생이 많았거늘, 신라는 이에 보답은 하지 않고 도리어 고 땅과 백성들을 뺏고 다만 왕의 누이 하나를 아내로 삼게 하였을 뿐이었다. 고구려의 유민들은 이 때문에 대를 물려서 원망을 갖고 불만을 품고 있다가 변을 일으켰는데 번번히 패했었다. 궁예 때에 이르러 나라가 어지럽고 쇠약함을 보고 이를 틈타 무리를 모아 조상의 옛 땅을 회복하고 싸여왔던 원한을 씻으려 했다. 곧 궁예는 죽주의 도적이었던 기훤에게 투항했는데, 훤이 업신여겨 이를 예로써 대하지 않았다. 궁예는 울분을 터뜨리고 스스로 편치 못하더니, 몰래 훤의 휘하의 원회 신훤등과 결탁하여 친구가 되어 북원의 적, 양길에게 투항했다. 양길은 이들을 잘 대우하여 이들에게 일을 맞겼다. 병력 100기를 나누어 주고 동쪽을 공략하게 하니 주와 군이 모두 항복했다. 또 아슬라를 공략하여 무리가 600이 되자 스스로 장군이라 부르게 했다. 힘들고 쉬운 일들을 모두 사졸과 함께 하고 뺏은 것을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 않고 함께 나누니, 무리들이 마음으로부터 두려워하며 따르게 되었다.
천복 27년 태수 왕륭은 궁예에게 귀순하며 그에게 설명하기를,
‘대왕께서 만약 조선 숙신 변한의 왕노릇 하고자 한다면 먼저 송악을 점령하고 나의 장자 건으로 하여금 그 주인이 되게 하는 것보다 상책은 없을 것입니다.’
하니 그 말에 따랐다. 때에 이훤은 병을 무진주에서 일으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내가 삼국의 근원을 상고해 본즉 마한이 먼저 건국하고, 혁거세가 뒤에 일어나고 변진이 그 뒤를 따랐다. 백제가 개국하여 600년을 전했는데 신라가 당나라와 합쳐 공격함으로써 멸망시켰다. 이제 나는 덕이 없지만 의자왕의 분을 풀려고 한다.’
마침내 완산에 도읍하고 왕을 칭하며 국호를 후백제라 하였다.
궁예도 역시 그 이듬해 왕이라고 칭하면서 말하기를,
‘신라는 당나라에 군대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했다. 이는 치욕스런 일야. 내 반드시 고구려를 위하여 그 원수를 갚을 터’
라고 했다. 국호를 후 고구려라 하고 건원하여 무태라 하였다. 남쪽으로 나아가 흥주사에 이르렀을 때 벽에 신라 전 왕의 화상이 걸려있음을 보고 칼을 뽑아 이를 쳤다. 궁예는 마음 속으로 신라를 합치고자 그 서울을 멸망시키겠다고 외치며 신라로부터 귀순해 오는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이 때부터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하고 머리에 금책을 썼다. 또 경 20권을 저술하고는 때때로 정좌하여 강설하였는데 승 석총은 말하기를 ‘모두 사설괴담으로 이를 들어 논할 가치도 없다’하니 궁예가 듣고는 철퇴로 때려서 죽였다.
천수 원년 무인 6월, 왕건은 홍유 배현경 신승겸 복지겸 등의 제장에게 추대되어 새벽에 곡식더미 위에 앉아 군신의 예를 행하고, 사람을 시켜 뛰어다니면서 ‘왕건이 마침내 의거를 들었다’하고 외치게 하니, 달려와 모이는 무리가 많았다. 먼저 궁문에 이르니 북치며 기다리는 자 역시 만여 명이라 마침내 포정전에서 즉위하고 연호를 정하여 천수라 했다. 여기에서 태봉왕 궁예는 변을 듣고 평복을 한채 문을 나서 도망하다가, 얼마 못가서 부양의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거란의 성종은 장군 소손녕을 보내 침략하니 봉산을 격파하여 우리의 선봉을 몰아 부쳤다. 성종 문의왕은 군신을 모아 의논하니 어떤이는 항복을, 어떤이는 땅을 갈라 거란에게 주자고 하는데, 중군의 서희만이 홀로 말한다.
‘지금 적군의 기세가 크다는 것만을 보고 즉시 서경이북을 적에게 준다는 것은 계책이라 할 수 없습니다. 또 삼각산 이북도 역시 고구려의 옛 땅입니다. 저들이 끝없는 욕심으로 이를 가지려 한다면 막지도 못할 것이라 하여 모조리 줄 것입니까? 항차 지금 땅을 잘라서 준다면 실로 만고의 치욕입니다. 원컨대 어가를 돌려 돌아가시고 신 등으로 하여금 한 차례의 싸움을 하게 해 주십시오. 그런 후에 이런 의논을 한다 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서희는 국서를 가지고 거란의 진영으로 가 상견의 예를 청하니 손녕이 말하기를,
‘나는 대조의 귀인이다. 마땅히 마당에서 절을 하라’
하니 서희는,
‘양국의 대인이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니 손녕이 또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신라의 땅에서 일어났다. 고구려 땅은 우리가 갖고 있는 바라. 그런데 그대들이 이를 침략하더니 우리와 땅을 맞대고 있으면서도 바다를 넘어 송나라를 섬기고 있다. 때문에 오늘의 전란이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땅을 쪼개어 이를 바치고 조공을 올린다면 일은 없을 것이다.’
라고 하니 서희 말하기를,
‘아니다. 우리나라는 고구려를 선조로 한다. 때문에 고려라고 이름하고 평양에 도읍했다. 만약 국경을 논한다면 곧 귀국의 동경은 모두 우리의 땅이다. 어찌 이를 침식이라 할 수 있으랴. 만약 여진을 쫓아 우리 옛땅을 되돌려 주면 곧 감히 교류하지 않을손가’
하니 말 솜씨가 강개한지라 손녕은 강변함이 쓸모 없음을 알고, 병을 파할 것을 결정하고 연회를 베풀고 위로한 뒤 서희를 송별했다.
도원수 윤관은 여진을 공격하고 격파하여 비를 선춘령에 세워 경계를 삼았다. 아들 언이를 보내 표를 올리고 축하하게 하였다. 평장사 최홍사 김경숙, 참지정사 임의, 추밀원사 이위 등은 선정전에 들어가 이에 대하여 극론했다.
‘윤관과 오연농과 임언 등은 함부로 명분 없는 군대를 일으켜 군을 파하고 나라를 해롭게 한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간관 김연과 이재등 역시 계속하여 탄핵하기를,
‘임금이 토지를 취하는 것은 본래 백성을 키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제 성을 다투며 사람을 죽였는데, 그 땅을 돌려주고 백성을 쉬게함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주지 않으면 반드시 거란과 말썽이 생길 것이옵니다.’
라고했다. 제 가로대 ‘무슨 말썽인가’ 하시니 김연이 아뢰기를
‘국가에서 처음 9성을 쌓았습니다. 거란에 표징을 고함에,<여진의 궁한리는 곧 우리의 옛 땅이다. 그 백성도 역시 우리의 편맹이다. 근래 변두리를 노략질 함이 끊이질 않기 때문에 수복하여 그 성을 쌓는다.>고 하였습니다. 표사가 그렇다면 궁한리의 추장은 거란의 관직을 받은 자일 것이니 거란을 그것 때문에 우리에게 망언을 하며 우리를 책양할 것입니다. 만약 동쪽을 여진에 대비하고 북쪽을 거란에 대비한다면 신은 9성이 삼한의 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옵니다. ’
라고 했다. 간의 대부 김인존도 역시 옛땅을 돌려줄 것을 청했다.
제는 선유하여 가로대 '양원수는 여진을 정벌하여 선제의 유지를 받은바라, 짐이 몸소 말하는것 을 행하여 몸은 활과 창을 무릅쓰고 깊숙이 적진에 들어가서 포로로 잡고 죽인자가 이루 다 셀수 없으며 100리의 땅을 열고 9주의 성을 쌓아 국가의 치욕을 갚았다면 그 공은 크다고 할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여진은 인면수심으로 변덕이 몹시 심하다. 저 남은 무리들이 있지만 의지할 곳은 없다. 고로 추장이 항복해 오며 평화를 청해오매, 군신이 모두 좋다고 하므로 짐도 역시 차마 어쩌지 못하겠다. 유사가 법에 따라 여러차례 탄핵을 논하는바 있어서 갑자기 그 직을 빼앗으려 한다. 짐은 종내 이를 허물로 여기진 않는다. 바라건대 속히 다시 복직하게 되기를 비노라'고 하였다.
예종 문효대왕4년 가을 7월, 9성에서 철수하여 여진의 옛땅의 돌려줬다. 이보다 앞서 여진은 요불과 사현등을 보내 상주하여 가로대,
'옛날 우리태사 영가는 말하기를 <우리 조종은 대방(고려)에서 나와 자손에 이르렀다>라고 하였으니, 마땅히 귀부하여야 옳을 것입니다. 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갑오 연간에 궁한리 사람들이 스스로 안정하려 들지 않았는데 이는 본래 태사의 지위 밑에 있던 바가 아니었습니다. 국조가 죄를 앞세워 이들을 토벌하시더니 다시 수교를 허락하셨으므로 우리는 이를 믿고 조공을 끊이지 않았는데, 작년엔 크게 일어나서 우리의 모아를 죽이고 9성을 쌓아 외로이 남은 백성들로 하여금 떨게하고 말려서 돌아가게 했습니다. 이에 태사는 우리를 보내어 땅을 되돌려 줄 것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또 재상 추밀원 대성 지재고 시신 병마판관 및 문무의 3품이상을 만나 다시 9성을 돌려 주는 일의 가부를 의논하니 모두가'읋다'고 했다. 옛사서에선 말한다.
'두 장군은 비를 선춘령에 세우고 이곳에 이르러 고려의 국경이라고 했다. 선춘령은 두만강으로부터 700리 밖 송화강의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한다.'
광주목 윤언이는 자해표에서 말한다. '중군 금부식이 상주한 것을 보건대, <언이가 정지상과 결탁하여 결사당을 만들어 크고 작은 일들을 상세히 의논하더니 임자년에 서경으로 행차하셨을 때에는 건원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또 국학생들을 유혹하여 앞의 일을 상주하도록 하였으니, 대저 대금국을 격동시키려고 일을 벌리고는 틈을 타서 제 멋대로 처리해 버렸고 다른 사람들을 당파로 몰아 공모하여 법도에 맞지 않는 짓을 함은 신하된 도리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신은 재삼 거듭하여 읽고난 후에야 겨우 마음에 안정을 찾았습니다.건원칭제를 청한 근본은 임금을 높이자는 정성입니다. 우리나라에도 태조와 광종의 고사가 있습니다. 지난 기록을 살펴 보더라도 비록 신라와 발해가 황제를 칭했어도 대국은 군대를 동원하지 못했고 작은 나라들은 의논도 끄집어 낼 수 없었으니, 잘못될 바가 어찌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좋은 때에 오히려 쩔쩔매는 셈이니 신은 일찌기 이를 논했습니다. 죄라면 그것입니다. 지금 결사당을 만들었다거나 대금을 격노하도록 만들었다는 말 등이 매우 크지만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강한적이 우리의 땅에 쳐들어 오면 이를 막아내기에도 벅찰텐데 어찌 그 틈을 이용할 수 있겠습니까? 당파를 만들었다고 하는 자는 누구이며, 누구를 가리켜 당파라고 하는지요? 만약 무리가 화합하지 못한다면 싸워봤자 패하여 오히려 몸둘 곳조차 없어질텐데 어찌 멋대로 모반하겠습니까? 생각하고 생각해 보아도 신은 지극히 자질이 약하나 서쪽으로 정벌의 전장에 나아가서 몸을 잊고 나라를 지켰으니 의로써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일의 이룸은 모두가 사람에게 달린 것인데 어찌 도에 맞도록 노력하지 않을 것입니까?'
<<금사>>에 말하기를 '세종은 대정 15년(1175)9월, 고려의 서경유수 조위총이 서언등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자비령 이서와 압록강 이동을 가지고 내부코자 하였으나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있다.
<<고려사>>에 말하기를 '예종 11년(1115) 3월 을미에 상은 요의 내원과 포주의 두 성이 여진에게 공격을 받아 성중에 양곡이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도병마록사 소억을 보내 쌀 1000석을 보냈으나, 내원은 통군이 이를 사절하고 받지 않았다. 8월 경진에 금나라 장수 철갈이 요나라의 내원 포주 두성을 공격하여 거의 함락하게 되었는데, 통군 야율령은 무리를 데리고 도망치려 했다.상은 추밀원 지주사 한교여를 파견하여 초유하니 야율령은 왕의 어지가 없다 하여 사양했다. 교여는 달려와 이를 주상했다. <추밀원으로 하여금 공문을 갖춰 이를 보내고자 한다>고 하였다. 재신과 간관은 말하기를 <저가 왕의 어지를 요구하지만 그 뜻을 알기 어렵다. 고로 이를 말리도록 요청한다>고 하니, 상은 곧 사신을 보내 금나라에 가서 청하기를 포주는 본래 우리의 옛 땅이다. 바라건대 요나라를 이 때문에 만나 뵙고자 한다>하니, 금나라 왕이 사자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그땅 내원성을 직접 취하라>고 하였다.
후암 이존비(-1287)는 고려 경효왕 때의 인물이다. 한 때 서연에 있으면서 자주부강론을 상주하였다. '우리나라는 한단조선 북부여 고구려 때부터 모두 부강자주해 왔다. 또 원을 세우며 칭제하는 일은 우리태조 때에 처음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사대의 논은 정해져서 국시가 되고, 군신상하가 굴욕을 감수하고 스스로 혁신할 기도를 하지 않음은 하늘이 두려운 바라. 나라를 보전함을 진실로 옳은 것입니다. 어찌하여 천하 후세에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워하는가? 바햐흐로 왜와 원한을 사려 하다가 원실에 변고가 생기면 장차 무었에 기댈 것인가? 그리고 나라를 위해 칭제하는 일이 시기를 핑계로 기피하는 바 된다면 참으로 회복할 수 없는 나라일 것이니, 자강책을 강구치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상주하는 바가 비록 채택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듣는자 이를 이를 그르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뒤에 또 왜에 대비한 5사를 말했는데
첫째, 호구를 잘 파악하여 병사로 삼을 것.
둘째, 군대와 농사일을 하나로 하여 수륙 공히 나라를 지킬 것.
세째, 군량을 비축하고 전함을 수조하는 일.
네째, 수군을 확장하며 겸하여 육전도 익혀둘 일.
다섯째, 지리를 상세히 익히고 인화를 확보할 일.
등을 말했다. 일찌기 회당상인에게 보낸 시 한 수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사물은 아름답고 더러움을 떠나서 쓰임이 있는데
누가 있어 쓴 오얏이 씨까지 많다고 싫다고 하는가?
맏아들은 천자가 되어 조정에 남지만
둘째부터는 새로 법왕의 가문을 이룬다네.
충성을 바침은 진실로 신하의 본분이고
사랑하는 이들을 떠남은 그게 바로 출세가 아니련가.
돌아보며 웃는 늙은이 상념에 빠지면
때로 꿈속에 들어 하늘 끝까지 아득해라.
상께서 일찌기 연경에 계실 때에 연나라 여인의 유혹을 받았다. 헤어질 무렵 손에 연꽃을 한개 쥐어주며 '상께서 돌아가시는데 이 꽃을 보시고 혹시 시들면, 이 목숨 막상 다하는 것으로 아십시오'하다. 며칠뒤 꽃을 보니 꽃이 초췌하여 죽으려 하는지라, 상은 여인의 죽음을 염려하여 다시 연나라로 가려하니, 존비가 청하여 연나라로 가서 여인을 찾아 보았다. 연나라 여인은 울며 시를 바쳐 가로대,
서로 바친 연꽃의 향기여
처음에는 붉은 빛 싱싱하였지.
가지를 잘라 며칠이 지나니
초췌하기 님과 같아라.
라 했다. 존비는 임금이 시를 보고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커질까 염려하여 그녀를 대신하여 시를 지어 바쳤다.
어리석은 사람아, 어리석은 사람아,
수레를 멈출 것 없다오, 수레를 멈출것 없다오.
이몸이야 연잎에 이슬 같아
거기서 구르면 여기서 둥글다오.
임금의 이 시를 보고 크게 노하여 마침내 귀국했다. 뒤에도 임금은 연나라 여인을 원망하기를 끊이지 않는지라 존비는 상주하여 '신은 그 때에 임금님의 봉환을 서두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권사를 했사오니 임금님을 속인 죄를 받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의 화가 나서 그의 관직을 뺏고 유배시켰다. 문의 태자와 조신이 반복하여 유배를 풀 것을 장계한 고로 임금은 다시 후회하며 깨달은 바가 있어 관직을 회복하여 소환했다. 그러나 사자가 채 미치기 전에 존비는 숨졌다. 부음이 임금에게 전해지자 크게 슬퍼하며 조회를 폐하였다. 태자가 상을 치룸에 말하였다. '이존비의 정직은 방가의 사직이다.어찌하여 요절함이 이 같을까?'라고. 곧 장사를 왕명으로 왕례를 써 행하고 마침내 형강의 변두리에, 그 산을 에워싼 4리로써 그를 봉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동을 왕묘라 하고 리를 산사라 한다.
행촌 이시중 암(1297-1364)은 일찌기 권신은 무리가 국호를 폐하려 하자, 이를 말려 청하여 행성의 의를 세웠으니, 그 소의 략에 이르기를 '하늘아래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나라를 가지고 나라를 삼고 또 각각 그 풍속을 가지고 풍속을 삼는다. 국계를 서물지 말라 민속 역시 섞지말라. 하물며 우리나라는 한단이래로 모두 천제의 아들을 칭하고, 제천을 행하는 일 있어, 절로 분봉하는 제후와 근본이 서로 갖지 않다. 지금 일시 다른 사람의 발 밑에 있기는 하나 이미 혼과 정신과 피와 살이 있어 한 한 근원의 조상을 갖게 되었으니, 이게 곧 신시개천으로부터 이를 삼한관경으로 하고 크고 이름난 나라를 하늘아래 만세에 만들게 된 연고이다. 우리 천수태조께서 창업의 바탕으로 고구려가 다물국을 세우신 풍습을 계승하사 온세상을 평정하시고, 나라의 명성을 크게 떨치었었다. 때로 강한 이웃이 생겨 틈을 타 휭포를 일삼았으니,유영의 동쪽이 아직도 우리의 것이 되지 못했다. 이것이 곧 군신이 낮밤으로 떨치고 나서서 도모하고 자주부강의 게책을 감히 세우고 있는 이유인데, 잠청과 같은 간사한 무리가 있어 기량을 자랑하며 남몰래 꾀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작다고 하지만 국호를 어찌 폐하려 하는가? 세력이 비록 약하다 한들 위호를 어째서 깎고 낮추려 하는가? 이제 그러한 행동거지는 모두 간사한 소인배의 포도에서 나온 바요 국민이 아니자의 공언일 뿐, 마땅히 도당에 청하여 그 죄를 엄히 다스릴진저'라고 하였다.
행촌시중은 저서가 세가지 있으니 <단군세기>는 원시국가의 체통을 밝힌 바 현저하고, <태백진훈>은 도학심법을 소개한 것이요, <농상집요>는 경제실무의 학문이다. 문정공 목은선생 이색은 이에 서문을 붙여 가로대
'대저 의식에 말미암아 족하게 되는 것, 재물을 쫓아서 풍부해지는 것, 자식 후손들이 의지하여 두루 갖춰야 할 것에 이르기까지 문을 가르고 비슷한 것을 모아 자세하게 나누어 밝히고 비추지 않음이 없다 할지니 실로 이치를 살리는 좋은 책이라'라고 하였다.
행촌선생이 일찌 천보산에 노닐 때에는 태소암에 묵었던 바 한 거사가 있어 말하기를 '소전은 많은 기이한 옛날 책을 가지고 있다.'이에 이명 범장처럼 신서를 얻으니 모두 옛 한단의 진결이라. 그 통달박고의 학문은 탁연하다고 칭찬할 만한 바가 있었다. 게다가 그 참전수계의 법은 대저 성을 엉기게 하여 지혜를 만들고, 명을 엉기어 덕을 이루고, 정을 엉기어 힘을 이루게 한다.그래서 우주에 있으며 삼신은 오래도록 존재한다. 저 사람과 사물에 있어 삼진이 멸하지 않음은 마땅히 천하만세의 대정신과 혼연히 그 체를 같이하고 생화하여 무궁한 때문이라'고 했다.선생은 가로대 '도는 하늘에 있을 땐 삼신이요, 도는 사람에 있을 때 삼진이라고 한다. 그 본을 말한다면 곧 일이 된다. 유일을 도로하고 불이를 법이라 한다. 클지로다. 한웅은 우두머리로서 서물에 나오셔서 길을 천원에 얻으시고 가르침을 태백에 세웠도다. 신시개천은 뜻을 처음으로 크게 세상에 밝혔노라. 지금 우리들 곧 글로 도를 구하고 참전하야 계를 받는다. 나의 가르침을 높이는 일도 아직 이루지 못했다. 또 듣는 일은 백가지라 하나 만나기 어렵고, 나이들어 어느덧 백발이 발치예 이르렀으니 한스럽기 짝이 없어라'고 했다. 선생은 시중 벼슬을 하시다가 강도이 흥행촌으로 퇴거하시고, 스스로를 흥행촌의 늙은이라고 부르시며 마침내 행촌삼서를 쓰시어 집예 간직하셨다.
현효왕의 뒤 5년 행촌 이암은 명을 받들어 참성단에서 제천하시고 백문보에게 말씀하시기를 '덕을 믿고 신을 수호함은 첫째로 신념에 달려 있고, 영재를 기르고 나라를 지킴은 공이며 발원이다. 곧 신은 사람에 의존하고 사람은 신에 의존해서 백성이라 할 수 있다. 그래야만 나라는 영원토록 안강을 얻으리라. 제천의 성은 보본으로 필경 돌아가는 것이니, 사람의 세상에서 그것을 구해 봐야 갑자기 사라질 거품과 같은 것을'이라 했다.
정지상은 하동사람이다. 일찌기 그의 누이로 안해서 원나라에 왕래하다가 경효왕을 만나 입시하여 수종함에 공이 있었으므로, 왕이 즉위하게 되자 즉시 뽑히어 감찰 지평에 이르렀는데, 일을 처리함에 큰소리를 치지 않았다. 일찌기 전라도의 안염사가 되어 암지에 가서는 세도가를 만나보더니 별안간 그를 사로잡아 문초하고 여러 고을에 이를 공시하니, 온 도가 다 가슴이 써늘했다. 야사불화라는 자는 본국사람이다. 원에 있으면서 순제(1332-1370)의 총애를 받았는데 그의 형 서신주는 육재가 되고, 동생 응여는 상호군이 되었다. 세력을 믿고 위복을 갖춰 국인이 그를 꺼렸다. 불화는 향사로서 본국에 이르러 이르는 곳마다 휭포를 멋대로 하였으니,존무사나 안림사들이 대개 욕지거리를 얻어먹거나 망신을 당했다. 이렇계 거칠게 굴다가 전주에 이르렀다. 정지상이 그를 맞아 근신하며 대접했는데 불화는 매우 거만하게 대했다. 반접사 홍원철은 지상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었지만 지상이 듣지 않았다. 원철이 격노하고 불화는 말하기를 '지상이 천사를 없신여긴다'고 했다. 불화가 지상을 결박하니 지상은 성을 내며 크게 주의 관리를 속여 외쳐 말하길,
'국가 이미 기씨를 주살하고 다시는 워나라를 섬기지 않는다. 재상 김경직을 원수로 임명하여 압록강을 지티계 했다. 이 사신을 제어하기 쉽다. 너희들은 무엇이 두려워서 나를 구하지 못하는가? 장치 서의 주가 강등되어 작은 현이 되는 꼴을 보려 하느냐?'
했다. 읍리들이 소리지르며 달려들어 결박을 풀고 도와 주었다. 지상은 마침내 무리들을 이끌고 불화 원철등을 사로잡았다. 이들을 가두고는 불화가 차고 있는 금패를 뺏아 서울로 달려 돌아왔는데, 공주를 지나면서 응여를 체포하고 철퇴로써 이를 치니 며칠 만에 죽어 버렸다. 지상은 달려와서 왕께 고했다. 왕은 경악하여 순군을 내리고 행성원외랑 정휘에게 명하여 전주목사 최영기및 읍리 등을 체포하고, 또 차포온을 보내 내온을 주고 불화를 위로하며 그 패를 돌려주었다. 원나라는 단사관 매주를 보내와 지상을 국문케 하였다. 왕은 뭇 기씨를 주살하고는 지상을 석방하여 순굿제공을 삼았다. 다시 호부시랑 어사중승를 거쳐 벼슬이 판사에 이르러 죽었다. 성품은 엄격하여 대개 큰죄를 다스릴 때에는 그를 보내었다. 지상의 과부로 담양에 살다가 왜인은 해를 입어 죽으니 아들이 박위를 따라 대마도를 정벌했다.
문대는 고종 안효대왕 18년, 낭장으로 서창현에 있다가 몽고병에게 잡혔다.몽고병이 철산성 밑에 이르러 문대로 하여금 성안의 사람을을 설득하계 하였다. 말을 시키기를 '진짜몽고병이 왔다. 재빨리 나와서 항복하라'고, 그러나 문대는 '가짜 몽고병이다. 그러니 나와서 항복하지 말라'고 하니 몽고인은 그를 죽이려 하다가 다시 한번 더 시켜 보았다. 다시 해도 전과 같이 하므로 마침내 그를 죽였다. 몽고병이 성을 공격하는데 아주 급하게 하였다. 성에는 양곡이 떨어지니 마침내 지키지 못하고 함락되려고 했다. 판관 이희적은 성중의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모아서 창고에 들어가게 한다음 창고에 불을 지르고는 장정들을 인솔하여 모두 자결했다.
경순왕12년(1351)신묘 3월에 은밀히 직사 이강은 명을 받고 참성단에 제지내고 나무판에 글을 새겨 시를 읊었다.
봄바람에 풍경은 풍션인냥 화사롭고
명을 받고 오는 길은 멀기도 해라.
날쌘 말에 채찍을 더해 아침에 궁궐을 떠났는데
배 띄운 저녁엔 하얀 갈매기 파도만 쫓네.
창공은 푸른 빛에 비취빛 산 색갈 묻어나고
골짜기엔 가득 기운이 차서 풀잎 절로 꽃피우지.
묻노라 봉래산은 어디라 할꼬
사람들은 이땅을 선가라 한다네.
마음 고요하고 몸이 한가로우면 뼈는 절로 신선이 되려 하는데
사람세상 여러가지 일은 참으로 정신없지
부평초 가득한 신비의 자리 중흥한 뒤에나
돌 쌓은 제단은 옛날로 돌아갈까.
이미 순으로 천리 땅을 바라보는데
어찌 몸이 구중 하늘에 있음을 의심할까.
이길은 짝도 없는 길이지만 있는 것만 같아
모름지기 서울의 일년과도 같아라.
강능왕 우의 5년((1391)3월 신미, 사자를 보내 참성단에 제사를 올리도록 하고 대제학 권근(1352-1409)이 서고문을 지어 바치니 그글에 가로대, '초헌에, 비다위에 산은 높고 멀리 뜬세상의 번요를 끊었노라. 단은 가운데는 하늘에 가까와 선어의 강림을 맞을 지며, 조촐한 공물을 지열하니 명신은 있느나 싶네. 재배에, 신이 들으심은 미혹하지 않으사 사람의 소원을 들으시며, 하늘의 덮으심은 삿됨이 없어 땅을 다 덮으시니, 이를 예로써 섬기면 마침내 트일지니.
그윽히 생각하니 마리산은 단군이 제사하신 곳. 성조로 부터 백성들을 위해 극을 세우시고 옛 것을 이어 휴식을 드리우셨네. 후왕에 이르러 오랑캐를 피하여 도읍을 옮기셨지만, 역시 여기를 의지하사 근본에 보답하시었고, 때문에 우리 가문은 이를 지켜 끊이지 않았도다. 그래서 짐은 작은 자식으로 이를 계승하여 더욱더 경건하였다. 하늘이시어, 어찌 왜구의 개같은 도둑떼에 의해서 우리 백성을 어란으로 하시겠는가? 먼나라의 수모를 받는다 하더라도(하늘은)아직도 우리의 표문의 길을 막지 않으시고 들으시노라. 하물며 저 읍민들이 오랑캐에 침략되는 것을 옳다고 참고 게시겠는가? 어째서 이름 떨칠 효험이 없을까보냐? 그럴리 없다. 덕의 좋음이 없음이로다. 참말로 남을 책하기 어렵고 오직 스스로를 책하는 데 있나니. 그렇지만 사람이 만일 그 업에 주저않지 않는다면 신이 마상 돌려주려고 해도 줄곳이 없을지며, 이에 구전의 준법을 쫓아 감히 당시의 우환을 고하노라. 진실은 관관하며 보감은 명명이라. 하늘이시여, 명을 밝히시옵고 크게 사직의 반석을 이루도록 빛을 받게 하소서'라고 하다.
천수기원 439년은 경효왕 5년(1357)이다. 이해 여름 4월 정유예 기철 권겸 노이등이 모반하다가 주살되었다. 정지상을 석방하여 순군제공을 삼고 정동행성의 이문소를 물리치게 하였다. 때에 원나라는 매우 쇠폐하여 오왕 장사성은 강소에서 기병하였고, 여러가지 일로 소란하였다. 최영등은 이 때 고우로부터 돌아왔다. 상께서는 처음 최영등과 의논하시사 서북지방 회복의 계획을 정하시고 먼저 정동행성을 격파하였다. 이어서 인당 최영등 여러 장수들을 보내사 압록강 이서의 8첩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또 유인우 공천보 김원봉 등을 보내어 쌍성등의 땅을 수복하도록 하였다.
10년 겨울 10월, 홍두적 번성 사유 주원장 등 10만의 무리가 압록강을 건너 삭주를 침략해왔다. 11년 적은 안주를 습격하니 상장군 이름과 조천주가 이 싸움에서 죽었다. 12월 상께서는 복주에 이르러 정세운으로 총병관을 삼으니, 정세운은 성품이 충성스럽고 깨끗하여 파천이래 낮밤으로 울분하며 우려하며 홍두적을 소탕하여 경성을 회복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생각하였으니 상께서도 그를 신임하셨다. 세운은 종종 애통의 뜻을 조서로 내리시고 민심을 가엾이 여기실 것을 청하여 사신을 각도에 보내 병력을 독려하도록 청하였다. 상께서는 마침내 조서를 내리시니 수문하시중 이암은 전하여 말하기를
'천하가 편안하면 뜻을 쏟아 백성을 다스리고 천하가 어지러우면 뜻을 쏟아 장수를 따라야 하리니, 나는 문신이기에 약해 빠져서 군에 몸담지는 못한다.그대는 내 뜻을 알고 힘을 다하라!'
라고 했다. 세운은 도당을 뵙고 분언양성하여 유숙에게
'군대를 점검하라. 뒤로 미루었다가는 문책을 당하리라'
라고 했다. 막 떠나려는데 이암이 세운에게 말하였다.
'지금 강력한 적들이 갑자기 황성에 밀어닥쳐 이를 지키지 못하고 수레를 타고 파천하였으니 천하의 웃음거리요 삼한의 치욕이라 할 것이다. 공은 대의를 부리짖어 무장하고 군을 통솔한다. 사직의 안녕과 왕업의 중흥은 이번 공의 일거에 달려있으니 우리의 임금과 신하들은 밤낮으로 공의 개선만을 빌 것이오'
라고 했다. 이렇게 격려하여 이를 내보내고 매일 제장을 독려케 하였다. 의를 부르짖으며 모의에 나아가서 계책을 주어 이를 도왔다. 이암의 종질 순과 한방신 등의 장수들이 이에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20년 신해 2월 갑술에 여진의 천호 이두란 첩목아는 백호 보개에게 백가구를 보내어 투항해왔다. 윤3월 기미 북원 요양성의 평장사 유익과 왕우승 등은 요양이 본래 고려의 땅이라는 뜻에서 우리나라에 투항하려고 사람을 보내어 이를 청해왔다. 이에 조정의 의견은 통일 되지 못하였고 국사는 다난했다. 그렇지만 임금은 정몽주를 명나라에 파견하여 촉을 평정함을 축하하도록 하였다. 김의는 명나라 사신 채빈을 죽여 버렸지만 조야가 모두 조용할 뿐, 이일을 말하려는 자 거의 없었다. 이 때문에 이 사실을 명나라에 회보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유익등은 마침내 금주 복주 개평 해성 요양등지를 가지고 명나라에 투항하였다. 오호라 청론을 떠드는 자들의 무기력함이여,스스로 좋은 기회를 잃고는 미침내 옛강토를 회수하지 못하였고나. 뜻있는 이의 원한 이처럼 깊은 것을!
강능왕이 선제의 명을 받아 즉위하였다. 이 때에 요동도사가 승차 이사경등 을 보내 압록강에 이르러 방을 붙여 가로대,'철령 이북 이동 이서는 본래 개원의 소관에 속한다. 군인 한안 여진 달달 고려는 곧 요동에 속한다'운운하니 조의는 분분하여 하나같지 않더니 마침내 전쟁을 결정하여 사방에 병마를 징발하고 최영을 팔도 도통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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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일사 발
세는 갑자년, 괴산에 유배되어 적소에서 마땅히 근신하니 매우 무료한 터라, 집에 간직한 여러 상자들을 취하여 조사해 본즉 사전으로 가칙 있는 것과 또 평소에 여러 고로들에게 들은 것들을 합쳐서 채록하였는데 책으로는 채 만들지 못했던 바라. 뒤 16년(1340)경진에 내가 찬수관으로 뽑혔기 때문에 열심히 내각의 비밀의 서적들을 얻을 수 있어 이를 읽고 이를 앞의 원고에 곁들여 편찬하고, 이름지어 <태백일사>라 하였다.
그렇지만 감히 세상에 내지 못하고 이를 비장하였다. 때문에 이 글은 문밖을 나서지 못했던 글들이다.
일십당 주인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