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y 13, 2012

북부여기


북부여기 상

휴애거사 범장 지음



시조 단군 해모수 재위 45년

임술원년 단제께서는 자태가 용맹하게 빛나시니, 신과 같은 눈빛은 사람을 꿰 뚫어 그를 바라보면 과연 천왕랑이라 할 만하였다. 나이 23세에 하늘에서 내려 오시니, 이는 47세 단군고열가 57년으로 임술 4월 8일이라. 웅심산에 의지하여 궁실을 난변에 쌓았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시고 용광의 칼을 차시며 오룡의 수레를 타셨다. 따르는 종자 500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시더니 이에 이르러 즉위하였다.

계해 2년 이해 3월 16일 하늘에 제사하고 연호의 법을 제정하더니 오가의 병력을 나누어 배치하여 밭 갈아 자급자족함으로써 뜻밖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기사 8년 단제께서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오가들을 회유 하시니 마침내 공화의 정치를 철폐하게 되었다. 이에 만백성들이 추대하여 단군이 되었다. 겨울 10월 공양태모의 법을 세워 사람을 가르침에는 반드시 태교부터 실시하도록 하였다.

임신 11년 북막의 추장 산지객륭이 영주를 습격하여 순사 목원등을 죽이고 크게 약탈질하고 돌아갔다.

경진 19년 기비가 죽으니 아들 기준을 아비의 뒤를 이어 번조선의 왕으로 봉하였다. 관리를 보내 병사를 감독하고 연나라를 대비하는 일에 더욱 힘쓰게 하였다. 연나라는 장수 진개를 파견하여 우리의 서쪽 변두리 땅을 침략하더니 만번한에 이르러 국경으로 삼게 되었다.

신사 20년 2명을 내리사 백악산 아사달서 하늘에 제사지내도록 하시고 7월 새로운 궁궐 336칸을 지어 이름하여 천안궁이라 하다.

계미 22년 창해역사 여홍성이 한나라 사람 장량과 함께 진나라왕 정을 박랑사 가운데에  저격하였으나 빗나가 부차를 박살내다.

임실 31년 진승이 군대를 일으키니 진나라 사람들이 크게 어지러웠다. 이에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의 백성들이 도망해서 귀순하는자가 수만명이나 되었다. 이들을 상하의 운장에 갈라 살게 하고 장군을 파견시켜 감독케하였다.

기해 38년 연나라의 노관이 다시금 요동의 옛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로써 경계를 삼으니 패수는 곧 오늘의 난하이다.

병오 45년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은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치 않으셨다. 단제께서는 병으로 인해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번조선 왕 기준이 크게 실수하여 마침내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상 하 운장을 떼어서 위만에게 봉해주었다. 이 해 겨울 단제께선 붕어하시고 웅심산 동쪽 기슬에 장사지내니 태자인 모수리가 즉위하였다.

2세 단군 모수리 재위 35년

정미원년 번조선 왕은 오랫동안 수유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복을 심어 백성들이 매우 풍부하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들에게 패하여 망한뒤 바다로 들어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오가의 무리들은 대장군 탁을 받들어 모두 함께 산을 넘어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의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가리켜 중마한이라 한다. 이에 이르러 변 진한의 두 한도 역시 각각 자기들의 받았던 땅 백리를 가지고 수도도 정하고 나름대로 나라 이름을 정했는데 모두 마한의 다스림을 따르며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

무신 2년 단제께서 상장 연타발을 파견하여 평양에 성책을 설치하고 도적떼와 위만의 무리에 대비케 했다. 이에 위만도 역시 싫증을 느꼈던지 다시는 침범치 않았다.

기유 3년 해성을 평양도에 속하게 하고는 황제의 동생 고진을 시켜 이를 수비케 하니, 중부여 일대가 모두 복종하매 그들에게 양곡을 풀어 주어 구제하였다. 겨울 10월 경향분수의 법을 세웠으니 서울도성은 곧 천왕이 직접 수비를 총괄하며 지방은 네 갈래로 나누어 군대를 주둔하도록 하니 마치 윷놀이에서 용도의 싸움을 보고 그 변화를 아는 것과 같았다.

신미 25년(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고해사가 즉위하다.



3세 단군 고해사 재위 49년

임신 원년 정월 낙랑왕 최숭이 곡식 300섬을 해성에 바쳤다. 이보다 앞서 최숭은 낙랑으로부터 보물을 산처람 가득히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서울 왕검성에 이르니,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년의 겨울이었다.

계축 42년 단제께서 몸소 보병과 기병 만명을 이끌고 위만의 도둑떼를 남여성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

경신 49년 일군국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헌상하였다. 이해 9월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고우루가 즉위했다.



4세 단군 고우루(혹은 해우루) 재위 34년

신유 원년 장수를 보내 우거를 토벌하였으나 이로움은 없었다. 고진을 발택하여 서압록을 수비하도록 하니 병력을 늘리고 많은 성책을 설치하여 능히 우거를 대비하는 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로 삼았다.

계해 3년 우거의 도적들이 대거 침략하니 우리의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해성 이북 50리의 땅이 모조리 우거의 땅이 되었다.

갑자 4년 단제께서 장군을 보내 성을 공격하였으나 석달 걸려도 이기지 못하였다.

병인 6년 단제가 몸소 정예군 5000을 이끌고 습격하여 해성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르니 구려하의 동쪽은 모두가 항복해 왔다.

정묘 7년 목책을 좌원에 설치하고 군대를 남여에 두어 이로써 뜻하지 않은 사태에 대비케 하였다.

계유 13년 한의 유철이 평나를 노략질하여 우거를 멸망시키더니 4군을 두고자 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다. 이에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나라 침략군을 연파하였다. 이에 그 지방의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일어나 호응함으로써 싸우는 군사를 도와서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갑오 34년 10월 동명왕 고두막한은 사람을 시켜서 고하기를 ‘나는 천제으 ㅣ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가시오.’ 라고 하니 단제는 매우 곤란해졌다. 마침내 단제는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동생인 해부루가 이에 즉위하였는데 동명왕은 여전히 군대를 앞세워 이를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으매 군신이 매우 이를 어렵게 여겼다. 이때 국상인 아란불이,

‘통하의 물가 가섭의 벌판에 땅이 있는데 땅은 기름지고 오곡은 썩 잘됩니다. 서울을 둘만한 곳입니다.’

라고 하며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도성을 옮겼다. 이를 가섭원부여라 하며 또는 동부여라고도 한다.





북부여기 하

휴애거사 범장 지음



5세 단군 고두막(혹은 두막루)재위 22년, 제재위 27년

계유원년, 이해는 단군 고우루 13년이다. 제는 사람됨이 호탕하고 용맹하여 군사를 잘 다루었다. 일찌기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연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이라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고열가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을해 3년 제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다. 열흘이 못되어 5000명이 모여 한나라 도둑들고 싸울 때2마다 먼곳에서 그 모습만 보고도 무너져 흩어져 버리므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에 이르니 바로 옛 고리국의 땅이었다.

갑오 22년 단군 고우루 34년에 제가 장수를 보내어 배천의 한나라 도둑들을 쳐부수고 유민과 힘을 합하여 향하는 곳마다 한나라 도둑떼를 연파하더니 그 수비장수까지 사로잡았으며 방비를 잘 갖추어 적에 대비했다.

을미 23년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함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단제가 이를 듣고 해부루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능으로 옮기게 하고는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이들을 앞세우고 수만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라 칭하였다. 가을 8월에 서압록하의 상류에서 한구와 여러 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다.

임인 30년 5월 5일에 고주몽이 분능에서 태어났다.

신유 49년 제가 붕어하고 유명에 따라 졸본천에 장사지냈다. 태자 고무서 등극하다.



6세 단군 고무서 재위 2년

임술 원년 제가 졸본천에서 즉위하고는 백악산에서 장로들고 함께 모여 사례에 따라 널리 하늘에 제사할 것을 약속하니 모두가 크게 기뻐하였다.

제는 나면서부터 신과 같은 덕이 있어 능히 주술로써 바람과 비를 불러 잘 구제하므로 민심을 크게 얻어 소해모수라고 불렀다. 이때에 한나라의 오랑캐들이 요하의 왼쪽에서 널리 소란을  피웠으니 여러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다.

계해 2년제가 영고탑을 순시하닥 흰 노루를 얻었다. 겨울 10월 제가 붕어하고 고주몽이 유언에 따라 대통을 이었다.

이보다 앞서 단제는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을 보고 사람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였었는데 이에 이르러 즉위하니 이해 나이가 23세 였다. 이때에 부여인이 그를 죽이려 하였는데 오이 마리 협보 등 세사람과는 덕으로써 사귄 친구였던지라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서 함께 길을 떠나 분릉수에 이르렀다. 그러나 건너려고 하여도 다리가 없으므로 뒤 쫓아 오는 군사들에게 몰릴까 두려워하여 물에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인데 오늘 도주함에 있어 추격병은 다가오고 있는데 어찌하란 말인가?’하니, 이때 물고기와 자라 따위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므로 주몽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흩어졌다.





가섭원 부여기

휴애거사 범장 지음



시조 해부루 재위 39년

을미 원년 왕은 북부여 때문에 제약을 받아 가섭원 혹은 분능이라고도 하는 곳으로 옮겨서 살았다. 오곡이 다 잘 되었는데 특히 보리가 많았고 또 범 표범 곰 이리 따위가 많아서 사냥하기 편했다.

정유년 국상 아란불에게 명하여 널리 베풀어 주변의 유민들을 불러 모으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잘 먹여주고 따뜻하게 살 곳을 주며 또 밭을 주어 경작하게 하니 몇해 안되어 나라는 풍부해지고 백성들은 풍족해 졌다. 때에 필요할 때마다 비가 내려 분능을 기름지게 하는지라, 백성들이 왕에게 정춘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임인 8년 앞서 하백녀 유화부인이 나들이를 나갔는 데 부여의 황손 고모수가 유혹하더니, 강제로 압록강변의 어떤 집에서 자기 멋대로 하여 버리고는 고모수는 승천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유화의 부모는 유화가 무모하게 고모수를 따라갔음을 책망하여 마침내 구석 방에 딸을 가두어 버렸다. 고모수는 본명이 불리지 이며 혹은 고진의 손자로고도 한다. 왕께서는 유화를 이상히 여겨 수레를 같이 타고 궁으로 돌아와 깊숙한 곳에 가두어 버렸다. 그해 5월 5일 유화부인은 큰 알 하나를 낳으니 한 사내 아이가 그 껍질을 깨고 나왔다. 이름을 고주몽이라 불렀는데 생김새가 뛰어났으며 나이 7세에 저 혼자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에선 활 잘 쏘는 것을 일컬어 주몽이라 하였으므로 이로써 이름으로 불렀다.

갑진 10년 왕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어느날 산천에 제사지내고 아들 있기를 빌었더니 타고 있던 말이 곤연에 이르르자 큰 돌을 마주보고 서서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을 이켜 그 큰 돌을 굴리게 하였더니 어린애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 모양이더라. 왕은 봅시 기뻐하며 ‘이 아이야 말로 하늘이 나에게 내리신 아기로다’라고 하시며 곧 거두어 기르니, 이름을 금와라고 하고 그가 장성하매 태자로 책봉하였다.

임술 28년 나라 백성들이 고주몽을 가리켜 나라에 이로움이 없는 인물이라 하여 그를 죽이려고 했다. 고주몽은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들어 동남쪽으로 도망하여 엄리대수를 건너 졸본천에 이르러, 이듬해 새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고구려의 시조가 된다.

계유 39년 왕이 죽고 태자 금와가 즉위하다.



2세 금와 재위 41년

갑신 원년 왕이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 특산물을 바쳤다.

정유 24년 유화 부인이 돌아가셨다. 고구려는 호위병 수만으로 졸본으로 모셔와 장사지냈는데 황태후의 예로써 억지로 산 같은 능을 만들고는 곁에 묘사를 짓게 하였다.

갑인 41년 왕이 돌아가시니 태자 대소가 즉위하였다.



3세 대소 재위 28년

을묘 원년 봄 정월에 왕은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국교를 성하고 왕자를 인질로 삼자고 하였다. 고구려의 열제가 태자 도절로써 인질을 삼으려 하였으나 도절이 가지 않으매 왕이 그를 꾸짖었다. 겨울 10월 병력 5만을 이끌고 가서 졸본성을 침략하였으나 큰 눈이 와서 많은 동사자만 내고는 퇴각하였다.

계유 19년 왕께서는 고구려를 침략하였는데 학반령 밑에 이르르자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

임오 28년 2월 고구려가 나라의 힘을 다모아서 침범해오니 왕은 몸소 무리를 이끌고 출전하였는데, 진흙탕을 만나 왕의 말이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에 고구려의 장군 괴유가 바로 앞에 있다가 살해하였다.  그래도 부여군은 굴하지 않고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큰 안개가 7일 동안이나 계속되니 고구려 열제는 몰래 병사를 이끌고 밤에 탈출하여 사잇길을 따라 도망쳐 달아나 버렸다. 여름 4월 왕의 동생은 따르는 무리 수백인을 데리고 길을 떠났는데 압록곡에 이르러, 해두왕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는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취하였고, 그 길로 갈사수의 변두리를 차지하고는 나라를 세워 왕이라 칭하니 이를 갈사라 한다. 갈사는 태조 무열제의 융무 16년 8월에 이르렀을 때, 도두왕이 고구려가 날로 강해짐을 보고 마침내 나라를 들어 항복하니, 대저 3세 47년만에 나라가 망했다. 고구려는 도두를 우대하고 부르도록 하고 저택을 하사하더니, 혼춘을 식읍으로 삼게 하여 동부여후에 봉하였다.

가을 7월 왕의 친척 동생이 여러 사람들에게, ‘선왕께서는 시해 당하시고 나라는 망하여 백성들은 의지할 곳 없다. 갈사는 두루 안락하기는 하지만 스스로 나라를 이루기 어렵고, 나 또한 재능과 지혜가 부족하여 나라를 새롭게 일으킬 수가 없으니 차라리 항복함으로써 살기를 도모하리라’ 하고 옛 도읍의 백성 만여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투항하니, 고구려는 그를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나부에 안치하였다. 그의 등에 띄와 같은 무늬가 있었던 까닭에 낙씨의 성을 하사하였는데 뒤에 차츰 자립하여 개원 서북으로부터 옮겨가 백랑곡에 이르니 바로 연나라의 땅에 가까운 곳이었다. 문자열제의 명치 갑술(AD 494)에 나라를 들어 고구려의 연나부에 편입하니, 낙씨는 마침내 제사조차 끊겼다.

- 끝 -



주; 여기서 대소왕이후 동부여는 망하여 둘로 갈린다. 대소왕의 동생이 갈사로 옮겼다가 고구려의 동부여후가 되었고, 동부여의 옛도읍에서는 대소왕의 친척 동생이 고구려에 항복하여 낙씨성을 받아서 고구려의 연나부가 되었다가  자립하여 개원서북으로 옮겼으나 결국 다시 연나부에 편입하였다.

      갈사는 혼춘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분릉 즉 동부여의 옛도읍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졸본과 멀지 않을 것으로 생각될 뿐이며, 주몽이 분릉에서 도망칠때 동남쪽으로 길을 떠났다는 말로 미루어 분릉의 동남쪽에 졸본이 있었지 않을까 짐작할 수 있지만, 문장상으로 그렇다는 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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